친구와 지리산을 가기로 했다. 봄에 바래봉 철쭉이 그렇게 유명하다며, 등산로 입구에서 그 해에 뽑힌 춘향 아가씨와 이몽룡이 악수를 해준다고 했다. 우리는 바래봉 뒷편에서 거꾸로 등반을 해 정상에서 철쭉을 보고, 다시 등산로 입구로 내려가 춘향 아가씨와 꼭 악수를 하고 오자는 원대한 목표를 세웠다.
그 근처의 민박집에서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문제는 우리가 등산 경험이 거의 없는 초보들이었고, 지리산이 얼마나 거대한 산인지 몰랐다는 것이다. 출발한 지 2시간 후 어느 능선까지 올라갔으나 그곳은 바래봉도 아니었고 철쭉 비슷한 색도 보이지 않았다. 바래봉 근처까지 가기 위해 지도를 보며 위험한 구간을 둘러 걷다 보니, 어느새 길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헤쳐서 만들고 있었다. 그러길 다섯 시간 이상, 해가 조금씩 기울어 숲은 이미 조금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제야 친구도 서둘러 내려가야 하는 것에 동의했다.
“물 소리가 나는 곳을 따라 내려가면 된댔어… 위기탈출 넘버원에서 봤어…”

우리가 디딘 거대한 바위더미 밑으로 우르릉거리는 위협적인 소리가 났다. 물길 곁으로 자란 나무들은 마치 수액 같은 것을 뽑는 듯 호스를 매달고 있었고 호스는 아래 방향으로 끊임없이 이어져 있었는데, 나는 그걸 사람의 손길이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물길을 따라 하염없이 내려가도 여전히 깊은 산속이었다. 마실 물도 없고 바위를 디딜 때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주운 나뭇가지로 겨우겨우 몸을 지지하며 걸어나갔다.
그러던 중 빽빽하고 거대한 풀숲이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헤치고 나가지 않으면 더 이상 산을 내려갈 방법이 없었다. 되돌아가거나 둘러가기엔 이미 너무 지친 상황이었다. 지친 몸으로 그 수풀에 억지로 몸을 밀어 넣던 그 때, 남은 기력이 모두 빠지며 순간적으로 정신이 혼미해졌다.
몇 초가 지나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여전히 서 있었다. 몸에 힘은 하나도 없는데, 이상했다.
사실 나는 끼여 있었다. 벼과 혹은 사초과로 추정되는 가볍고 억센 풀 사이에 거의 들어 올려지다시피 한 채로.
절망했다.
‘그냥 쓰러지고 싶다.’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 난 그대로 한참을 그렇게 끼여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해가 거의 다 저물 무렵 민가 쪽으로 내려왔고, 우연히 마주친 마을 주민분이 데려다주어 밥도 먹고 무사히 민박집으로도 돌아올 수 있었지만 그날 이후로 몇 년은 산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지금은 그냥 미련하고 웃긴 얘기지만 20대 때엔 자주 그 순간을 떠올리며 무서워했다. 별로 소득도 없고 무엇 하나 뜻대로 되지 않는 자잘한 시도 후엔 어김없이 그 풀에 힘없이 끼여 있던, 겨우 들어 올려져 있지만 차라리 무너지고 싶던 무력한 모습이 겹쳐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맘대로 안 되는 것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를 지치게 만든 시절이었던 것 같다.

앙코르와트의 타프롬 사원을 에워싼 벵골 보리수, 바니안나무가 사원과 맺는 관계는 조금 독특하다고 한다. 거대하게 성장한 뿌리와 줄기로 사원을 휘감아 옥죄는 바람에 사원은 붕괴가 가속화되고 있지만, 그 나무를 제거한다면 사원은 역설적으로 오히려 더 쉽게 무너져버릴 것이라고 했다. 한 마디로 그 나무는 사원의 파괴자이면서 동시에 보호자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는 날 제압하면서 동시에 일으켜주었던 그 수풀을 떠올리게 했다. 깊숙이 침투한 바니안나무와 그에 휘감긴 사원의 모습처럼, 무섭기도 원망스럽기도 경이롭기도 한 대자연의 모습이었다.
식물성
여러 식물과 동거중. 책 <식물 저승사자>, <식물의 이름이 알려주는 것>, <나는 식물 키우며 산다>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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