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농부에게서 좋은 농산물이 나온다지속 가능한 농업이란 무엇일까요?
안리안21. 11. 16 · 읽음 744

‘우리가 소개하는 먹거리가 사람의 몸과 그 원물이 자라는 환경을 해치지 말아야 하고, 나아가 유통 과정 또한 환경을 해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제가 농산물과 가공식품에 대해 갖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철학입니다. 그러한 농업과 유통 환경을 만들기 위해선 생산자와 소비자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서 ‘유통업’을 하며 느끼는 아이러니가 있는데요, 생산자도, 소비자도 스스로를 약자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입니다. 생산자는 고된 일을 하면서도 소비자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유통업자에겐 늘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는 피해의식을, 소비자는 생산자나 유통업자의 상술에 속고 있다는 피해의식을 갖고 있더라고요.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린 지 가려내기란 쉽게 않겠죠. 누군가는 속고, 누군가는 속이며 사는 세상이니 말이에요. 그렇지만 이런 상황을 염세적으로 받아들이고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하는 부정적인 마음을 갖기보다 ‘나부터 바뀌자’, ‘적어도 나는 그러지 말자’ 라는 생각과 행동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생산자와 유통업자, 소비자 모두를 위해 ‘상식적인’ 검품과 ‘상식적인’ 유통, ‘상식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어요.

우리나라 농업의 발전 혹은 지속 가능한 농업을 위해 저 같은 개인 혹은 소규모 업체가 할 수 있는 일은 유통계에 엄청난 혁신을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농산물 유통사의 역할을 원점으로 초기화하는 길에 앞장서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농부와 소비자 사이의 빈틈을 채워주는 것이 농산물 유통 서비스의 역할인 거죠. 농부에게는 소비자의 요구사항을 끈질기게 설명하고, 소비자에게는 땅과 농부, 유통의 현실과 상황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 안리안

처음 농산물 유통 플랫폼을 시작했을 때 우선 소비자의 입장에서 접근했습니다. 당시 농산물의 본질이나 환경에 대한 부분보다 SNS 피드나 고객의 식탁 위를 채울 먹거리의 미학적 부분과 감성적인 영역을 주력으로 다룬 것도 같은 맥락이었지요. 예를 들자면, 2015~2016년 당시 국내 소비자들이 생경하게 느끼던 국내산 패션프루츠나 아스파라거스를 대대적으로 소개하며 인스타그래머블한 포장과 모든 상품에 편지 형식의 상세한 안내장을 동봉하는 방식으로 소비자의 호응을 이끌어냈죠. 덕분에 농업이나 농산물에 관심이 적던 젊은 층의 지지와 관심을 받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높아진 인지도가 매출로 이어졌어요. 소비자의 수가 꾸준히 증가하면서 그들의 피드백을 반영해 점점 더 많은 종류의 농산물을 다루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더 많은 농부와 더 많은 땅을 접하면서 친환경, 무농약, 유기농법을 거쳐 ‘자연재배 농법’으로 자란 농산물을 집중적으로 소개하게 되었죠. 그런데 어느 시점을 지나니 ‘친환경 농법’에도 여러가지 맹점과 허점이 있다는 사실과 농법 이전에 농산물을 키워 내는 사람의 생각이나 태도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자연스레 깨닫게 되었어요.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고 난 이후 지금은 ‘지속적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농부와의 협업’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사람은 별로인데 그가 키운 농산물이 맛있다’ 거나 ‘농장 환경은 별로인데 농법이 좋은 농장’과 일한 경험이 몇 번 있었는데, 그런 경우에는 크든 작든 결국 문제가 발생하더라고요. 그래서 이제는 ‘존경할 만한 농부’, ‘책임감 있는 사람’과 일하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고 있어요.

그런데 여기서 ‘존경할 만한’ 부분이 농부의 인간적 ‘성품’을 말하는 것은 아니에요. 농부 스스로 본인이 키우는 농산물에 대한 집착과 끈기, 열정, 성실함을 갖고 있는 동시에, 함께 일하는 파트너에 대한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을 밑바탕에 두고 농업과 먹거리의 근간이 되는 환경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농부, 그리고 최종 목적지인 ‘소비자’의 반응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농부. 그런 사람이 좋은 농작물은 키워내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 모두를 올바른 방향으로 성장시킨다고 믿습니다.

그런 농부를 찾은 다음엔 그들이 재배한 농산물을 최종 소비자에게 전달하는데요, 가장 중요한 역할은 그 이후부터 시작됩니다. 소비자의 반응을 면밀히 살피고, 그들의 피드백을 다시 1차 생산자인 농부에게 전달해 다음해 농사에 반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죠. 크고, 예쁘고, 맛 좋은 농산물을 골라내는, 당장 눈에 보이는 기술을 연마하기보다, 농부들이 일년 더 농사를 지을 용기를 얻도록, 소비자들은 십년 후에도 제대로 된 농부의 손에서 자란 건강하고 신선한 농산물을 먹을 수 있도록 발판을 튼튼하게 다지는 데 집중하는 것. 농업과 농산물에 대한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의 기대 수준을 높이는 일을 소명으로 여기며 한 걸음씩 차근차근 걸어가보려고 합니다. 매일 조금씩 세상과 사람에게 무해하고도 이로운 방향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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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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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어촌 환경과 농수산업 관련 콘텐츠를 연구하고 기획하는 스타트업 ‘언더스탠드’의 대표이며, 동시에 철학과 소신이 있는 농부들이 키운 최고의 농수산물과 가공품을 찾아 합리적인 가격대에 제공하는 온라인 큐레이션 플랫폼 ‘마켓레이지헤븐’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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