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잎을 좋아한다. 호박잎에 밥을 올리고 된장에 호박과 양파와 감자와 고추가 뭉그러지게 지져 만든 쌈장을 얹어 먹으면 여름도 견딜 만하다고 생각된다. 이상하게도 호박잎 쌈은 꼭 이렇게 채소를 넣고 뭉근하게 익혀 만든 쌈장과 먹어야 맛이 난다. 고구마줄기와 오이상치라고 부르는 늙은 오이 무침도 좋아하는 여름 음식이지만 호박잎에 대한 애정에는 못 미칠 것 같다.
어릴 때부터 호박잎과 호박을 좋아했다. 집에는 늘 늙은 호박이라고 부르는 커다란 호박이 있었다. 신데렐라의 호박 마차로도 변신할 수 있을 만큼 웅장하고 튼튼한 호박이었다. 나는 이 호박을 넣고 끓이는 김치찌개와 호박을 넣은 김치를 좋아했고, 늙은 호박으로 만든 호박죽과 호박을 말려 만든 호박고지를 좋아했다.
이제 이 늙은 호박은 잘 볼 수 없다. 먹는 데에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 그래서 고추를 말려 고춧가루를 직접 만들고 모든 장을 담가먹는 나의 엄마도 늙은 호박이 아닌 단호박으로 죽을 쑨다. 나는 아무리 애쓴다고 해도 단호박으로 만든 호박죽을 좋아하지는 못할 듯한데, 늙은 호박으로 만든 호박죽을 먹고 나면 그렇게 된다. 단호박은 그냥 단데, 늙은 호박에는 단맛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단호박의 단맛이 단순하다면 늙은 호박의 단맛은 단순하지 않다. 그래서 이제는 잘 찾아볼 수 없게 된 늙은 호박을 넣은 음식을 만나면 감격하게 된다. 서초동에 있는 한 식당에서 늙은 호박을 넣어준다는 이유로 나는 그 집 김치찌개만 사먹고, 또 제주에서 파는 갈치국에 늙은 호박이 들어 있다는 걸 알고 나서 제주에 가면 반드시 갈치국을 먹는다.
애호박과 돼지호박이라고도 부르는 주키니 호박도 좋아한다. 여름에는 애호박과 새우젓, 두부와 명란을 넣고 맑게 끓이는 호박찌개를, 겨울에는 고추장을 풀어 돼지고기와 새우젓, 두부와 홍고추를 넣어 끓이는 호박찌개를 해먹는다. 주키니 호박으로는 새우와 함께 파스타를 해 먹으면 좋다. 애호박이든 주키니든 구워서 샐러드나 샌드위치를 만들어 . 그래서 내가 장을 볼 때 늘 사려고 하는 것 중에 호박이 빠지지 않는다. 냉장고에 없으면 불안하기 때문이다.
특용 작물을 재배하시는 분이 처음 보는 호박을 보내주신 적이 있다. 그 호박은 단호박과 늙은 호박을 섞은 듯한 맛이었고, 호박의 결이 늙은 호박처럼 가닥가닥 떨어졌다. 럭비공처럼 타원형으로 생겼는데 아무리 검색을 해도 이름을 알 수 없었다. 최근에 알게 되었다. 만차랑 호박이다. 만차랑이 무슨 뜻인지 알고 싶은데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
최근에는 호박의 넝쿨 맛도 알게 되었다. 내가 호박잎을 좋아하는 걸 아는 어떤 분이 넝쿨까지 주셔서 맛을 보게 된 것이다. 호박잎을 찌면서 호박의 줄기인 넝쿨을 같이 쪄서 먹었는데, 호박잎보다 못하지 않았다. 호박이 매달려 있었던 튼튼한 줄기를 삶으면 그렇게 연해진다는 것도 놀라웠고, 열매와 잎사귀와 줄기와 씨앗까지 모두 먹을 수 있는 호박에 새삼 경외감이 들었다. 이러니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왔다”라는 말이 생긴 거라고도 생각했다.
그리고, 호박은 꽃도 먹는다. 이탈리아에서 한 달 지낸 적이 있었는데 동네 슈퍼마다 호박꽃을 팔았다. 엔다이브처럼 가지런히 정렬해 포장되어 있었다. 식당에서는 호박꽃 튀김을 팔았다. 호박꽃 안에 치즈를 넣고 튀겨낸 음식이다. 그때는 호박꽃 튀김을 먹겠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지만.

일주일 전, 갑자기 호박꽃으로 뭔가를 만들어 먹고 싶어졌다. 한국의 슈퍼에서는 호박꽃을 팔지 않으므로 얻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힘들게 얻은 호박꽃을 손질하다가 지쳐버렸다. 씻어도 씻어도 벌레가 나왔고, 어떤 호박꽃에는 벌이 들어 있기도 했다. 리코타 치즈와 필라델피아 크림 치즈, 잣과 소금과 애플민트를 섞어 만든 속을 호박꽃에 넣었다. 튀김 대신 오븐에 굽기로 하고 구워냈는데, 세상에… 여전히 벌레가 있었다. 호박과 함께 구워진 것이다. 나는 그걸 입에 넣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벌레가 이렇게 많은 걸 보니 약을 거의 안 친 유기농 호박일 텐데, 또 이렇게나 많은 벌레 때문에 호박꽃은 먹기 힘든 아이러니 앞에서 식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약을 치지 않고 농사를 짓는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싶었다. 껍질까지 먹겠다며 유기농이나 무농약이라고 표시된 채소를 사는 편인데, 정말 그게 가능한 일인지 말이다. 벌레가 수정해주니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인데, 끊임없이 벌레를 죽일 수밖에 없는 농사라는 일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탈리아에서는 호박꽃의 벌레를 없애는 특별한 기술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문득 궁금해진다.
한은형
소설가. 소설집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와 장편소설 <거짓말>, 산문집 <그리너리 푸드: 오늘도 초록>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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