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슬로푸드냄비에 강원도 막장과 각종 채소를 넣고 오랜 시간 지집니다
한은형21. 12. 31 · 읽음 1,776

나의 된장 인생은 빡짝장을 알기 전과 후로 나뉜다. ‘빡찍장’이라고도 하는 것 같은데 강릉의 백반집에서 괴상한 이름에 끌려 시켰다가 깜짝 놀랐다. 어떻게 이런 찌개가 있지? 내가 그전까지 먹어본 모든 된장 요리를 우습게 만드는 맛이었다. 거의 영접이라고도 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강릉에 갈 때마다 빈 통을 가져가서 사오곤 했었다. 내가 공수를 담당한 건 아니고, 빡짝장을 같이 영접한 마음 넓고 부지런하기도 한 지인이 공수해서 나눠주곤 한 것이다.

알고 보니 빡짝장은 막장의 강원도 말이었다. 빡짝장 찌개라고 쓰지 않고 빡짝장으로 쓴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된장을 만들 때 간장을 빼지 않으면 막장이 된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그때까지 이렇다 할 막장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빡짝장은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고동색이고, 짜지 않고 깊은 감칠맛이 났다. 내가 먹은 빡짝장 찌개는 얼핏 강된장 같지만, 강된장과는 매우 다르다. 국물이 거의 없다시피하고 건더기가 빽빽한 강된장과는 달리 빡짝장에는 건더기가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맛은 심오했다.

빡짝장을 팔던 식당은 문을 닫았고, 이제는 더 이상 구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강원도 막장을 구해서 빡짝장을 끓여 보기도 했지만 그 맛이 안 났다. 그러던 어느 날, 귀인을 만났다. 길에서 만난 아저씨였다. 몇 년 전, 강원도의 어느 동네를 산책하고 있었는데 그 아저씨가 마침 마당일을 하고 있었고, 몇 마디를 주고받았고, 여차저차해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그 아저씨의 차에 실려 정선오일장에 간 적이 있다.

발단은 빡짝장이었다. 내가 맛있는 강원도 막장을 구하고 싶다고 하자 아저씨가 정선으로 인도했다. 정선 가는 길에 막장을 파는 정갈한 가게가 있다며, 본인도 그 막장을 먹고 있는데 괜찮다고 했다. 그런데 마침 정선오일장과도 날짜가 겹쳐 시장에도 가게 된 것이다. 그 집은 국도에 인접해 있었다. 원래는 식당도 같이 하다가 이제는 장만 판다고 했다. 가게의 뒤뜰에서 머릿수건을 쓴 여인이 항아리를 닦고 있었다. 항아리 닦는 여인은 한복을 입고 있었다. 분명하지 않다. 내 기억 속에서 각색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머릿수건을 했던 것만은 분명히 기억한다. 몇 백 개는 족히 되어 보이는 간장, 고추장, 된장, 막장 항아리가 뜰에서 반질거리고 있었다.

그곳 막장을 사용한 이래로 나는 된장찌개 명인이 된 듯한 착각에 빠져 있다. 옛말이 틀리지 않았다. 장이 맛있으면 다 맛있다. 정말 모든 게 다 맛있다. 이 막장을 만나게 된 이후 된장찌개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귀찮음을 무릅쓰고 정선에 갔던 그 날이 떠오르며, 내가 이 막장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여전히 된장이나 막장을 찾아 헤매고 있을까도 궁금하다. 최근에는 진관사의 된장이 맛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불자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이야기라고.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사람은 맛있긴 한데 너무 달다고 했다. 아마도 나는 또 진관사 된장을 구해 먹어보지 않을까 싶은데, 사실 내가 지금 먹고 있는 막장만 평생 먹는다고 해도 불만은 없다.

ⓒ SUNGMIN / iStock

막장으로는 주로 된장찌개를 끓이고, 어떤 양념도 하지 않고 아삭이 고추나 오이를 찍어 먹는다. 그냥 장만 먹어도 이런저런 양념을 한 쌈장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가끔은 무쇠냄비에 채소를 잔뜩 넣고 된장을 지지기도 한다. 한 시간 동안. 푹 익힌 채소쌈장 같은 이것을 나의 엄마는 ‘된장 지진 거’라고 표현하는데 정확한 명칭은 모르겠다. 강된장도 아니고, 빡짝장도 아니고 된장지짐이다. 양파를 맨 아래 깔고 양배추나 배추, 애호박, 감자, 고추를 넣고 물은 조금만 넣고 막장을 넣고 뭉근히 끓인다. 엄마는 고추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한다. 청양고추나 꽈리고추가 아니라 풋고추로 해야 한다고, 잔뜩 약이 오른 풋고추로 해야 제 맛이 난다고.

한 시간은 상징적인 시간이다. 더 해도 되고 덜 해도 된다. 어쨌든 채소가 뭉그러져 제 형체를 잃고 서로에게 스며들 때까지 지지면 된다. 약불에서 오래 뭉근히 익히는 이 음식은 대체불가능하다. 나는 이 된장지짐이 코리안 라따뚜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슬로푸드다.

올리브 오일에 채소를 넣고 오래 끓이는 라따뚜이보다 막장에 채소를 넣고 오래 지지는 이 음식이 더 슬로푸드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콩이 메주가 되고, 메주가 장이 되고, 장이 익어가는 숙성의 시간까지 더해지기 때문이다. 올리브 오일은 아시다시피 햇올리브 오일이어야 가치를 인정받는다.

냄비 앞에 서서 막장을 지지고 있으면 그날의 반짝거리던 항아리와 머릿수건을 쓴 여인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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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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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소설집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와 장편소설 <거짓말>, 산문집 <그리너리 푸드: 오늘도 초록>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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