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출판한 책 ‘식물 문답’의 리뷰를 살펴보곤 합니다. 어떤 점이 좋았고 아쉬웠는지를 적어주신 글 중에서 언젠가 다뤄야겠다고 마음에 담아둔 내용이 하나 있습니다. 책에서는 화투 패 중 그 이름에서 어떤 식물인지 알 수 없는 똥과, 싸리라고 부르지만 사실 전혀 다른 식물인 흑싸리 두 가지만 다루었는데, 비나 공산 같은 아리송한 패도 어떤 식물을 테마로 했는지 설명해주었으면 좋았겠다는 것이었지요.
화투 패 비를 떠올려봅시다. 잔털이 난 길고 검은 형체가 패 중 세 장에 있기에 비 세트의 테마가 되는 식물임을 알 수 있지만, 그 어떤 종인지는 짐작하기 어렵지요. 그 형태가 기묘해서 초등학생 때에는 짚신벌레라고 혼자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비광을 살펴보면 작은 개울과 개구리가 있으니 물가에 자라는 식물일 듯하고, 우산을 쓴 사람이 함께 그려져 있으니 인가와 멀지 않은 곳에서 볼 수 있으리라는 추측은 할 수 있습니다. 이 식물은 과연 무엇일까요?

버드나무 혹은 능수버들
화투 비는 일본에서 ‘야나기’라고 부르는데, 우리 말로 버드나무라는 뜻입니다. 일본 화투 원판을 함께 살펴보지요. 우리나라 화투에서 검은 덩어리로 보았던 것이 본래 아래로 쳐진 가느다란 가지와 녹색 잎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섬세한 가지를 바닥 쪽으로 드리운 버드나무의 실제 생김새와 똑 닮았습니다. 앞서 비광에서 살펴보았듯, 버드나무는 물가에서 자라고 인가 주변에서 많이 심어 가꾸기도 하니 주변 묘사도 잘 맞아 떨어집니다.
그런데 따져보면, 버드나무가 아니라, 능수버들이라고 하는 것이 조금 더 정확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버드나무’ 하면 떠올리는 그 나무는 사실 능수버들이기 때문이에요. 하늘거리는 줄기가 거의 수직으로 내려오는 능수버들과 달리, 버드나무는 조금 더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늘어지고 그 길이가 능수버들보다 대체로 짧은 점이 다른 별개의 식물입니다. 기준이 조금 모호한가요? 더 명쾌하게 나누어보자면, 늘어진 줄기를 손으로 살짝 끊어보았을 때 질겨서 잘리지 않는 것이 능수버들, 쉽게 부러지는 것이 버드나무입니다.
비광에 그려진 사람은 누구일까?
비광에서 우산을 든 이 사람은 누구이고, 버드나무와 어떤 인연이 있는 걸까요? 이 사람은 헤이안 시대에 살았던 오노노 도후라는 서예가입니다. 비 오는 날, 서예가로서 자신의 재능이 부족하다 여기며 산책하던 중, 개구리 한 마리를 보게 됩니다. 개구리는 늘어진 가지를 향해 계속 뛰었지만 높이가 모자랐죠. 오노노 도후가 이 개구리는 나뭇가지에 닿을 수 없을 거라 생각하던 찰나, 바람이 불어 휘어진 줄기 위로 개구리가 안착합니다. 이 모습을 보고 깨달은 바가 있던 그는 다시 서예를 시작했다고 해요.
만약 화투를 우리나라에서 만들었다면, 어떤 사람이 들어갈까요? 아마도 고려 태조 왕건과 장화왕후일 것입니다. 갈증을 느끼며 행군하던 왕건은, 나주 금성산에서 오색 구름을 발견합니다. 그곳을 찾아가니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던 아름다운 처녀가 있었죠. 왕건이 물 한 그릇을 청하자 처녀는 급히 마셔 체하지 않도록 바가지에 버드나무 잎을 띄워 건네주었다고 해요. 처녀의 지혜에 감탄한 왕건은 그녀를 아내로 맞았는데, 이 처녀가 바로 장화왕후이지요.
몰라도 그만이지만
사실 화투패 속의 버드나무를 그저 짚신벌레 비슷한 것으로, 비광의 서예가는 그저 사람으로 생각하고 넘어가도 그만입니다. 게임 룰에 상관이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이번 글에서 다룬 내용들, 그러니까 ‘비’가 사실은 버드나무였다는 것, 버드나무와 능수버들은 다른 나무라는 점, 그리고 버드나무가 등장하는 우리나라와 일본의 옛 이야기를 읽으며, 식물을 알아가는 작은 즐거움을 느끼셨길 바랍니다. 그리고 제 책을 리뷰해주셨듯, 이번 글에서도 궁금한 점이 있으시다면 꼭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몰랐던 식물 이야기, 함께 알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이 글에서는 능수버들과 수양버들을 같은 종으로 보았으며 국명은 능수버들, 학명은 살릭스 바빌로니카로 표기했습니다.
조현진
식물과 풍경을 그리는 일러스트레이터. 조경학을 전공했다. <식물 문답>을 출간했고, <환경과 조경>에 ‘풍경 감각’을 연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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