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여름 휴가를 다녀와 그렸던 그림일기를 펼쳐봅니다. 살구색 색연필로 우리 가족을 칠하고, 파란색으로 바다를 채워두었네요. 그해 여름 우리의 얼굴은 껍질이 벗겨질 정도로 빨갛게 익었고, 우리가 간 곳은 누런 안면도 바다였지만요. 얼굴은 살구색으로, 바다는 파란색으로 칠하는 것이 조금 더 자연스럽고 익숙하게 느껴졌나 봅니다.
어린 시절 그려놓은 식물도 살핍니다. 색색깔 꽃들 뒤로, 똑같은 초록색 잎을 가득 단, 똑같은 갈색 나무들이 보입니다. 나무가 모두 같은 색깔이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아홉 살의 저에게, 나뭇가지 몇 종류를 그린 이 그림을 보여주고 싶어집니다. 그림 속 나뭇가지 중 색깔을 잘못 칠한 게 있냐고 물어보면서요.

모두 제 색으로 칠한 나무다
어린 저에게는 이 그림들은 모두 잘못 칠한 것처럼, 혹은 가짜처럼 보일 겁니다. 그렇지만 이 그림은 모두 제 색으로 칠한, 실제 나무들입니다.
1번은 흰말채나무입니다. 이름에 ‘흰’ 자가 들어갈 정도로 하얀 열매가 특이하지만, 붉은 줄기도 열매 못지않게 아름답지요. 특히 겨울날, 하얗게 쌓인 눈 사이에 솟은 흰말채나무 줄기를 본다면 누구라도 그 선명한 빨간 색에 마음을 빼앗길지도 모릅니다.
2번은 노랑말채나무입니다. 노랑말채나무는 꽃, 잎, 열매 모든 부분이 흰말채나무와 비슷하지만, 줄기가 노랗다는 점이 다릅니다. 깨끗한 노란색 줄기가 아름답기에, 붉은 흰말채나무와 함께 공원 혹은 정원에 자주 심습니다.
3번은 죽단화입니다. 죽단화는 봄이면 귀여운 노란 꽃이 피어 정원수로 많은 사랑을 받는 나무지요. 죽단화와 꼭 같지만 꽃이 홑겹으로 피는 황매화도 그렇고요. 이들의 줄기를 살펴보면 녹색이며 매끄럽습니다. 마치 나무가 아닌 풀처럼요.
4번은 복분자딸기입니다. 요강이 넘어질 정도로 건강에 좋다는 그 복분자 열매를 맺는 나무이지요. 복분자딸기의 줄기는 여느 나무들과는 달리 흰 가루로 덮여 있습니다. 희끗한 복분자딸기의 줄기는 온통 푸르고 무성한 한여름에 특히 돋보입니다.
나무의 줄기를 살피는 일
위 식물들 외에도 줄기가 독특한 식물을 여럿 찾을 수 있습니다. 오래전 산림녹화를 위해 심었던 은사시나무의 줄기를 살펴볼까요? 흰 바탕에 검은 다이아몬드가 늘어선 모양이 신기합니다. 향긋한 모과 열매를 맺는 모과나무 줄기는 알록달록한 색으로 바꿔 칠한 옛 군복 패턴이고요, 넓은 잎이 운치 있는 벽오동은 잎처럼 푸른 줄기를 가집니다.
우리 주변 나무들의 줄기에서도 독특한 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실 나무의 줄기는 각 수종의 특징을 또렷하게 보여주는 지표 중 하나거든요. 가로수를 떠올려볼까요? 은행나무 줄기는 회갈색이고 세로로 깊게 갈라집니다. 왕벚나무는 가로로 긴 껍질눈이 생기고, 양버즘나무는 껍질이 조각조각 떨어지고요. 친구들 한 명 한 명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두 제각각 다르듯, 식물들도 꽃이나 잎, 열매뿐 아니라 줄기도 모두 다른 것이지요.
줄기는 갈색이 아니야
중학교 미술 시간을 기억합니다. 선생님께서는 피부는 혈관 때문에 빨갛기도 파랗기도 하다는 것, 그리고 연두색이나 회색도 있다는 걸 알려주셨습니다. 물은 파랗지 않고, 맑거나 탁하거나, 물결치거나 반짝이거나, 깊거나 얕다는 것도요. 신기하게도 그날 오후, 친구들의 얼굴에서는 빨강, 파랑, 초록, 회색이 보였고, 수돗가에 흐르는 물은 유달리 반짝이고 투명했습니다.
어린 날의 저에게 나뭇가지는 갈색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상상을 합니다. 그날 오후, 나무에서 어떤 색을 찾았을지, 그리고 어떤 그림을 그렸을지 떠올려보다가 오래된 스케치북을 덮습니다.
조현진
식물과 풍경을 그리는 일러스트레이터. 조경학을 전공했다. <식물 문답>을 출간했고, <환경과 조경>에 ‘풍경 감각’을 연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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