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막연한 불안감으로 상담실을 찾는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물론 나쁘기만 한 일은 아닙니다. 불안하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뜻이고 소망이 있다는 의미이며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는 반증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문제는 항상 ‘과도함’에 있습니다.
“선생님, 직장을 구할 수 있을지 걱정이에요. 제 나이에 친구들은 벌써 번듯한 직장에, 자동차에 다 이뤘는데, 저만 도태된 것 같아서 너무 괴롭습니다.”
얼마 전 상담을 한 C씨가 털어놓은 속내입니다. 충분히 할 수 있는 고민입니다. 점차 양질의 일자리는 구하기 힘들어지고, 사회적 소통망(SNS) 덕분에 타인이 지나치게 잘 살고 있는 소식은 매일매일 내 마음을 후벼팝니다. 그런데 이처럼 취직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 때문에 정작 제대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지 조차 못한 사람도 많습니다. 고민만 하다가 시간을 보내게 되는거죠. C씨는 긴 취준생 생활에 지쳐 눈높이를 낮추어 한 직장에 입사합니다. C씨의 걱정은 과연 끝났을까요? 이내 곧 또 다른 걱정이 꼬리를 뭅니다.
“요즘 불경기인데 회사가 갑자기 망하기라도 하면 어쩌죠? 남들처럼 지금이라도 공무원 준비를 해야 할지....”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걱정거리를 가지고 와서 하염없이 불안해하는 사람을 간신히 현실로 데려와 착지를 시키면 또 다른 걱정거리를 만들어내기 시작합니다. 알라딘이 램프에서 ‘지니’를 부르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증상을 ‘램프 증후군’이라고 부릅니다. 좀 어려운 의학용어로는 ‘범 불안장애’라고도 하죠. 습관적으로 램프에서 ‘지니’를 불러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불안이 가라앉고 지금의 상태에 겨우 안정이 될라치면 ‘지금이 램프를 꺼낼 시간이야’ 하고 지니를 부르는 주문을 외웁니다. 지니는 끊임없이 새로운 걱정거리를 하나씩 가지고 나타나는 것이죠.

‘제가 시험에 통과할 수 있을까요? 공부를 하려고 하는데 도저히 집중이 안 돼요!’ ‘힘들게 시험에 통과해서 원하는 직장에 겨우 출근을 했는데 또 다른 걱정이 엄습합니다. 여기서 잘 버틸 수 있을까요? 제 실력이 모자란 것을 주위에서 알고 도태되면 어쩌죠?’ ‘어머니가 가신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아버지도 갑자기 제 곁을 떠날까봐 너무 걱정이 돼요. 저도 불치병 선고를 받게 되는 건 아닐까요?’ ‘코로나 바이러스가 확산되어 다 감염되는 거 아닐까요? 이러다 아이들 공부도 못하게 되는 건 아닌지 너무 걱정이 돼요’
미리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심리에는 내가 그 주제에 대해 많이 생각할수록 더 잘 대비할 수 있고 대처할 수 있으리란 믿음이 깔려 있습니다. 미래에 잘 대비하기 위해서는 계속 걱정을 해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심리학자 어니 젤린스키는 우리가 걱정하는 일 중 실제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것은 4퍼센트에 불과하고, 그 외는 사소하거나 혹은 어차피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준비했다 하더라도 일이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필자가 대학병원 전공의 4년차였을 때입니다. 전문의 자격을 취득하면 어딘가 취직을 해야 할 텐데, 선배들의 경우를 보니 새로운 병원에서 입을 가운이 바로 확보되지 않아 전공의 때 사용하던 가운을 활용하는 경우가 많아 보였습니다. 새로운 직장에서 입을 깨끗한 가운을 미리 준비해야 겠다고 마음먹은 후 저는 해마다 제공되는 새 가운 하나를 사용하지 않고 휴게실 한 편에 잘 보관해두었습니다. 준비를 완벽히 했다는 생각에 내심 흐뭇했죠. 그런데 전문의 시험공부를 하느라 몇 주간 자리를 비우다 병원에 복귀를 해서 보니, 제가 보관해둔 새 가운을 임시로 채용된 연구직 선생님을 위해 비서분이 제 이름표를 떼어 내고 친절하게 건네던 참이었습니다. 임시직이라 가운이 제공되지 않았던 선생님을 배려한 비서의 적절하고 융통성 있는 대처였죠. 저와 친했던 비서 분은 아마도 제가 사용하지 않은 새 가운을 구석에 던져두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일을 계기로 저는 세상일은 예측한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작은 깨달음과 함께 매 순간 최선을 다하되 결과에 연연해하지 말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끊임없이 미래를 걱정하고 일어나지 않을 일 때문에 미리 불안해하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이 현재 이 순간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미래를 계획할 수 있나요?’ 이 질문에 베트남의 고승 팃낫한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미래를 위한 최고의 계획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현재를 등질 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지금 이 순간으로 가져올 때 이루어진다.’
즉, 알 수 없는 막연한 미래에 머무르지 말고 현재를 살아가면서 미래를 초대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자연스레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고, 노력한다한들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 무엇인지 구분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미래를 현실로 초대했을 때야 비로소 우리가 현재 노력해서 바꿀 수 있는 것은 정말 미미하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김민경
다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진료원장을 맡고 있다. 최근 작은 식물을 가꾸는 일에 즐거움을 느껴, 시선이 머무는 곳에 식물을 놓아두고 내담자들을 만나고 있다. 저서로는 <마음이 답답할 때 꺼내보는 책>, <현대인의 심리유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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