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이사 온 새 집은 정동향으로 통창이 나있다. 일찍 일어나면 일출을 볼 수 있다. 하늘 위에 수채화처럼 퍼져가는 고운 빛깔. 눈을 뜨자마자 할 말을 잊는다. 붉은 빛 번짐은 순식간에 사그라들고 밝아진 하늘에 샛노란 해가 모습을 드러낸다. 갓 태어난 해는 에너지가 굉장해서 얼굴이 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다. 집에서 해 뜨는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것은 퍽 설레는 일인데, 시간이 갈수록 그 신선함이 점점 옅어졌다. 일출을 보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는 날이 적어진다.
잠에서 깨어나는 문제가 나만 어려운 것은 아닌가 보다. 로마의 16대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는 50만 대군을 이끌고 대륙을 누비고 다닌 철인이었지만, 그도 안락하고 따뜻한 침대 밖으로 나갈까 말까 고뇌하곤 했다고 한다. 불교 수행자들은 이른 새벽 잠을 떨치고 일어나는 것을 우선적으로 배운다. 태아가 고통 속에 울면서 세상 밖으로 나오듯, 우리는 매일 아침 이불 밖으로 치열하게 부활해야 하는 운명이다.
아침을 시작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으면, 20년 전 일본인 의사 사이쇼 히로시(稅所弘)가 쓴 <아침형 인간>이라는 책이 이른 기상 신드롬을 일으킨데 이어, 근래에는 할 엘로드(Hal Elrod)의 <미라클 모닝>이 전 세계 늦잠쟁이의 마음을 휩쓸었다. 책에서 얻을 수 있는 팁은 간단하다. 아침에 해야 할 일의 목록을 작성하고 실천하기. 일종의 루틴을 만드는 것이다. 명상, 독서, 운동 등 평소에 시간을 내서 하기 어려웠던 자기 발전적 일을 목표로 정하는 것이 좋다. 정해 놓은 루틴을 수행해서 성공적으로 하루를 시작하겠다는 책임감이 나를 침대 밖으로 이끈다.

올해는 차를 마시며 독서하는 아침 루틴을 실천하기로 마음먹었다. ‘차와 책’, 늘 그리워하지만 일상에 지쳐 결국 미루고 마는 대상이다. 특히 아침에는 다양한 홍차를 마셔보기로 했다. 커피보다 연하지만 잠을 깨우기 딱 적절한 약간의 카페인, 그리고 상큼한 맛과 향이 아침에 어울린다. 내일은 구입한 지 한참 된 이어령 선생의 인터뷰 책을 읽기로 한다. 거기에 정산소종 홍차를 곁들일 것이다. 중국 복건성에서 만드는 정산소종은 어린 찻잎을 말릴 때 소나무를 태워 연기의 향이 베게 한다. 스모키한 이 홍차의 향기가 노학자의 깊이 있는 이야기와 어딘가 어울린다.
미리 정해놓은 책 한 권과 그에 어울리는 차. 살짝 설레는 마음을 품고 잠든다. 소소한 기대감이 내일 아침, 밤의 기운을 맹렬하게 떨칠 용기를 북돋을 것이다. 고대하던 일이 있는 날 아침에는 눈이 한 번에 떠지지 않는가. 과일향 가득한 복건성 홍차, 고구마의 달콤함이 느껴지는 운남성 홍차, 상큼한 맛을 터뜨리는 다즐링 퍼스트 플러시와 강렬한 스리랑카 우바… 다채로운 홍차의 붉은빛 그리고 매일 새로운 하늘의 수채화. 내일의 일출은 더 아름다웠으면 좋겠다. 잉글리시 브렉퍼스트보다 근사한 용산 브렉퍼스트.
인선
채널A 앵커. 바쁜 일상 속 차를 마시는 시간으로 위로를 얻습니다. 책 <차라는 취향을 가꾸고 있습니다>를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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