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시간 동안 뉴스 진행을 마치고 나면 밤 8시. 교감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다. 하루 중 가장 격렬한 활동을 마친 뇌는 아직 흥분한 상태. 집에 가길 거부한다. 누굴 만나서 재미있는 대화를 하고 맛있는 것을 우적우적 먹고 싶다. 예전에는 비슷한 증세를 앓는 방송국 동료들과 무교동 선술집으로 향하곤 했다. 한때 밤새도록 들썩이던 무교동 거리는 이제 밤 9시면 고요해지고, 늦은 저녁 일이 끝나는 사람은 꼼짝없이 집에 가야 한다.
어두운 집으로 돌아와 혼자 앉아 있으면 외로운 마음이 사무친다. 누군가는 ‘뇌를 비우고 싶다’며 멍하니 텔레비전을 본다고 했다. 그 마음을 이해한다. 집에 돌아와 생각이 필요한 일을 또 하고 싶지는 않다. 퇴근 후 자기 개발을 하는 사람들이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뛰쳐나가고 싶은 뇌를 위로하기 위해, 그리고 마음을 비우기 위해 혼자 와인을 따른다. 선물 받은 위스키를 홀짝여보거나, 시원한 맥주 한 캔을 딴다. 그렇게 코로나 이후 혼술은 더 늘었다.
술은 감정의 확성기라고 했던가. 술 한 잔이 집 밖에서 가져온 감정들을 증폭시킨다. 상사의 까칠한 말 한 마디, 연락이 없는 사람에 대한 섭섭함, 다가올 휴일에 대한 기대와 여러 가지 걱정. 술을 만난 뇌는 하루의 일을 정리하지 못하고, 전날의 감정을 잘 개키지 못한다. 여전히 흥분된 상태로 이불 속에 들어가 잠을 청한다. 아침이 되면 어제의 혼술은 힐링의 시간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숙취보다 더 찌부둥한 마음이다.
나처럼 근래 혼술족이 된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는 들었다. 모두들 코로나 2년차가 되자 슬슬 자기반성을 하기 시작했나 보다. 영국에서는 새해만큼은 술을 줄이자는 ‘금주의 1월(Dry January) 캠페인이 벌어지기도 했다. 나 역시 ‘금주는 너무 냉정하니 혼술이라도 자제하는 절주를 해보자’ 결심을 한다. 그러나 일이 끝나고 어두운 방으로 돌아오면 또 몹시 외로운 마음이다. 위로가 필요하다.

보글보글. 찻물 끓이는 따뜻한 소리. 술잔을 올렸던 식탁에 티팟을 꺼냈다. 밤이니까 카페인이 없는 대용차가 좋겠다. 일전에 만난 스님이 직접 볶았다며 우엉차를 고운 통에 담아주었다. 아껴두었던 그 차를 꺼낸다. 우엉은 겉껍질에 공복 혈당을 낮춰주는 사포닌 성분이 풍부하여 예부터 천연 식욕억제제로 쓰였다고 한다. 이처럼 밤에 마시는 우엉차는 야식과 혼술을 대체할 뿐만 아니라 절제하게 하는 역할도 톡톡히 한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항스트레스와 항우울증 성분도 있다고 하니, 우엉차야말로 외로움을 앓고 있는 코로나 혼술족에게 딱 맞는 처방이다.
까만 나무 조각처럼 오그라들었던 우엉이 뜨거운 물속에서 퍼진다. 그 모습을 보며 이것을 만든 사람의 정성을 생각한다. 우엉을 하나하나 조각 내고 햇볕에 말리고, 거뭇하게 될 때 까지 9번씩 볶으며 어떤 마음을 담았을까. ‘누군가에게 위로와 건강이 되길’ 바라는 바람 아니었을까. 하루 동안 쌓인 여러 감정의 조각을 감사의 마음으로 차분하게 정리한다. 만든 사람의 바람 그대로, 오늘밤 혼차는 진짜 치유의 시간이 된다.
인선
채널A 앵커. 바쁜 일상 속 차를 마시는 시간으로 위로를 얻습니다. 책 <차라는 취향을 가꾸고 있습니다>를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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