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로부터 음식을 구하라‘냉장고로부터 음식을 구하라’ 프로젝트의 류지현 작가가 버리지 않는 식탁을 소개합니다.
류지현21. 08. 30 · 읽음 7,907

장바구니에서 꺼낸 감자는 빛이 닿지 않는 서랍 안에 넣고 양파는 통풍이 잘되도록 망 주머니에 넣어 대롱대롱 매달아 놓습니다. 고등어는 깨끗이 씻고 소금을 뿌려 온도가 제일 낮은 냉장고 아래 선반에 집어넣습니다. 양배추를 담아둘 접시에 물을 붓고 있는데 남편이 가득 찬 장바구니를 들고 집에 들어섭니다. 이런, 어쩌나. 텅 비어가던 부엌이 갑자기 온갖 식재료로 넘쳐납니다. 구석구석 자리를 찾아 장바구니 두 개에 가득했던 식재료를 정리합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열두 구짜리 달걀 두 판. 이 많은 걸 어떻게 해야 한담. 달걀이 많이 들어가는 스페인식 오믈렛, 토르티야를 만들려다 프라이팬만큼 큰 오믈렛을 둘이 언제 다 먹나 싶어 요리 검색을 시작합니다. 간단한 해결책을 발견했어요! 달걀 장조림!

쇠고기 장조림으로 많이 알려진 장조림은 냉장고가 없던 시절 식재료를 좀 더 오래 두고 먹기 위해 고안해낸 보관 방식이자 요리법입니다. 시래기, 마른 나물 등 말린 식재료부터 각종 김치류와 장아찌 등 한국 전통 식문화에서 보관이나 저장을 위한 요리와 채소와 과일 보관법을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먹을 것이 지금처럼 풍족하지 않았던 그 시절에는 생존을 위해 식재료를 적극적으로 관찰하고 낭비 없이 이용해야만 했으니까요. 그 노력은 집집마다 맛있는 식탁으로 꽃피우며 오랜 시간을 거쳐 음식 보관 지식의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왔습니다.

이탈리아 전통 방식으로 치즈를 만드는 할머니. © 류지현
이탈리아 전통 방식으로 치즈를 만드는 할머니. © 류지현
전통 방식으로 말리는 감. © 류지현
전통 방식으로 말리는 감. © 류지현
토마토를 말리는 과정. © 류지현
토마토를 말리는 과정. © 류지현

사실 냉장고가 우리 생활에 등장한 것은 인류 역사에서 꽤 근래의 일입니다. 세계 최초의 가정용 전기냉장고는 1910년대에 등장했으며 한국산 냉장고는 1960년대가 되어서야 생산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냉장고가 생활필수품이지만 시간상으로 보자면 냉장고 없는 생활이 인류에게 더 익숙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음식 저장 문화는 인류의 역사와 같이해왔으므로, 오랜 시간 차곡차곡 쌓여왔을 수많은 지혜가 얼마나 방대할지 헤아리기조차 어렵습니다.

50년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 냉장고는 부엌의 필수품으로 자리 잡아왔습니다. 많은 이들에게 식재료의 관리는 전적으로 냉장고의 몫이 되었죠. 인류의 역사를 따라 할머니의 입에서 손주의 입으로 전해지던 채소와 과일에 대한 지식과 관리법은 점차 사라지고 있습니다. 식재료에 따라서는 냉장고에서 영양과 맛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식재료는 무조건 냉장고에 보관합니다. 냉장고 외에 다른 보관 방법은 일부러 찾아야만 알 수 있는 특별한 것이 되었습니다.

내가 먹을 식재료를 직접 관리하는 게 아니다 보니 사람과 식재료 사이에 냉장고만큼의 거리가 생겼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죠. 이전에는 어떤 식재료가 추위에 약한지, 어떤 식재료가 습도에 약한지를 경험으로 알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식재료가 있다는 것조차 알기 어렵습니다. 태어났을 때부터 부엌에는 늘 냉장고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또 다른 생명으로서의 가치를 잃은 먹거리들은 이제 하나의 상품으로 존재합니다. 손쉽게 구매하고 주저없이 버립니다. 냉장고 안에서 썩어가는 식재료가 있는데 또 다른 것을 사다 냉장고에 넣습니다. 먹다 남은 음식은 바로 음식물 쓰레기봉투로 직행합니다. 냉장고에 넣어둔 남은 음식이나 자투리 식재료 등은 냉장고에서 한두 번쯤 나왔다 들어가기를 반복하기도 하고 어떤 것들은 아예 냉장고에 진을 치고 있기도 하죠. 그리고 어느 날 진녹색 곰팡이가 듬성듬성 생긴 채 발견돼 쓰레기통으로 들어갑니다.

음식을 잘 보관하려고 이용하는 냉장고인데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잊어버려서, 혹은 식재료를 어떻게 다루는지 알지 못해서 오히려 불필요한 음식물 쓰레기를 만들곤 합니다. 세계농업기구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생산되는 식재료의 3분의 1이 소비되지 않고 버려진다고 해요. 세계 인구의 10퍼센트가 넘는 사람들이 여전히 기아에 시달리고 기후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는 지금, 우리의 부엌에서부터 나와 우리 가족, 나아가 지구 전체가 건강한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1인 가구가 한국 전체 인구의 4분의 1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클릭 한 번으로 장을 볼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농부 직거래 장터나 협동조합에서 운영하는 가게를 쉽게 찾을 수 있죠. 장기 저장 음식에 의존하던 100년, 200년 이전의 방식만을 따를 필요도, 마술 상자 같은 냉장고를 조왕신처럼 모시기 시작한 50년 전처럼 살 필요도 없습니다. 각각의 장단점을 이해하고 식재료의 특성과 스스로의 생활 방식을 고려해 취할 것은 취하되 버릴 것은 버려야죠. 지금을 사는 우리는 그 어느 때의 관습이 아닌 지금에 맞는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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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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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 류지현은 '냉장고로부터 음식을 구하자' 캠페인으로 식재료 본연의 성질에 맞는 보관법과 식생활을 제안한다. 이는 유럽 연합에 의해 음식물쓰레기를 줄이는 프로젝트의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제로 웨이스트 키친> <사람의 부엌>에서 프로젝트를 자세히 읽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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