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광주 남한산성숲산성, 그 안의 도시 그리고 소나무
작은날개22. 03. 25 · 읽음 10,509

조선의 인조에게 남한산성은 다시 떠올리기 싫은 곳일 겁니다. 혹독했던 그 겨울, 청의 홍타이지 앞으로 나아가 삼고구배(땅에 머리를 세 번 찧고 아홉 번 절을 올리는 만주족의 인사 예법)을 올려야 했으니까요. 그래서일까요. 남한산성을 떠올리면 자꾸만 차가운 한겨울의 북풍이 온몸으로 느껴지는 듯합니다.

사실 이 산성은 훨씬 오래전부터 이 자리에 있었습니다. 기록으로 보자면 신라 문무왕 대에 이미 이곳에 관한 문구가 나옵니다. 당시에는 ‘주장성’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일장산성’이라고도 쓰고 있고요. 다른 기록에서는 원래 이곳이 백제의 시조인 온조의 성이었다고도 합니다. 

ⓒ 정태겸

물론 지금 이 산성 안쪽의 것은 대부분 조선의 흔적입니다. 왕이 지방으로 행차할 때 머무는 행궁도 이곳에 있습니다. 상궐이 73칸 반, 하궐이 154칸이니, 그 규모가 상당합니다. 심지어 행궁 중에서는 유일하게 종묘와 사직까지 두고 있습니다. 병자호란의 난리를 피해 인조가 이곳으로 향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성도 큽니다. 둘레가 12킬로미터에 이르고 성 안쪽으로는 무려 100호의 가옥이 있었죠. 제법 커다란 도시가 형성돼 있던 겁니다. 1969년의 조사에 따르면 그 당시 이 성에는 면사무소, 초등학교, 경찰지서, 우체국, 여관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남한산성을 이야기하면서 꼭 소개하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60만 제곱미터에 달하는 소나무숲입니다. 남문에서 수어장대를 지나 서문을 돌고 북문과 동장대까지 이어집니다. 여기에 소나무 1만4,000본이 자라고 있죠. 수도권 일대를 통틀어 이만한 규모의 숲을 가진 곳은 흔치 않습니다. 알고 보면 이 숲은 조선시대부터 보호를 받던 곳입니다. 산성을 수비하는 데 있어 울창한 산림은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될 테니 당연한 일입니다. 

문제는 늘 사람의 욕심입니다. 땔감이 필요한 사람들은 이 산성의 소나무를 무분별하게 베어서 가져다 썼습니다. 이로 인해 수시로 산사태가 일어나기도 했고요. 산성마을의 유지였던 석태경이 사재를 출연해서 1만 그루가 넘는 소나무를 다시 심은 건 그래서였습니다. 고종 때도 김영준이라는 인물이 산성 내 산사태 피해지와 그 인근에 1만5,000주의 소나무를 식재했다는 문구도 보입니다. 그때 심은 나무가 지금 이 숲을 이루고 있는 것이니, 평균 수령이 100년은 훌쩍 넘어갑니다.

ⓒ 정태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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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태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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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태겸

일제강점기에도 숲이 사라질 뻔했습니다. 전쟁 물자와 땔감으로 쓰기 위해 일제는 무차별 벌목을 감행합니다. 이에 마을 주민 303인이 1927년 ‘남한산 금림조합’을 결성하고 벌목을 막으려 애쓰기도 했죠. 산성의 행궁 아래에 세워진 ‘산성리 금림조합장 불망비’는 당시의 노력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2014년 남한산성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습니다. 여기에는 산성을 둘러싼 소나무숲도 한몫을 크게 했지요. 과거 숲을 지키고자 했던 이들의 노력 덕분에 우리는 산성을 따라 걷는 동안 이토록 멋진 소나무숲을 만날 수 있습니다. 과거 이 숲을 지킨 사람들 덕분에 우리는 이런 숲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소나무숲은 그들에게 ‘미래의 희망’을 의미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그 희망을 우리가 지켜서 후손들에게 전해야겠지요. 남한산성을 걷는다면, 성곽길을 따라 우뚝 솟아오른 소나무를 눈여겨보길 권합니다. 분명 그 숲이 남다르게 다가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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