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 상륙한 카페는 각국의 문화와 만나 독자적인 모습을 띄기 시작한다. 특히 영국의 커피하우스는 사설 신문사, 사설 우체국, 주식 거래소 등 다양한 근대화 기구를 탄생시키며 영국이 세계 최강의 국가로 거듭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650년 영국 옥스퍼드(Oxford) 성 미카엘 골목(St Michael’s Alley)에 영국 최초의 카페가 문을 연 이후 하나둘 늘기 시작한 커피하우스는 1714년 8,000여 개에 이르며 절정을 맞는다. 영국의 커피하우스는 모든 남성이 정보를 얻고 새로운 문물을 익히는 ‘1페니 대학교(Penny universities, 커피 한 잔 가격으로 지식과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이라는 뜻)’로 자리 잡았다. 당시 영국은 계급 사회로 다른 계급 간의 교류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커피하우스만큼은 계급과 상관없이 모든 시민이 모이는 공공 장소가 된다. 특히 17세기 영국은 해상 무역을 두고 네덜란드와 경쟁하고 있어 세계 각국의 정보가 절실히 필요했다. 영국 정부도 이를 자각하고 신문까지 만들긴 했지만 당시 해상 무역 종사자들은 정부에서 내려온 한 발 늦은 정보가 아니라, 날 것의 생생한 소식을 목말라했다. 커피하우스는 바로 이런 갈증을 해소해줄 장소였던 것이다.

각지에서 활약하던 상인들이 커피하우스에서 최신 정보를 공유하고 있을 즈음, 영국의 언론인이자 정치가 리처드 스틸(Richard Steele)은 이를 좀 더 적극 활용하고자 문인 조지프 애디슨(Josep Addison)과 함께 커피하우스에서 오가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모아 일주일에 한 번씩 소식지를 발행한다. 그 방식은 이랬다. 각 지역마다 ‘통신원 데스크’를 두어 현지 커피하우스에 출입하는 손님을 통해 양산된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한 데 모아 섹션으로 구분하고 주간지 형식으로 발행한 것. 섹션이나 통신원 같은 용어를 포함해 이는 근대 신문을 만드는 모태가 됐다. 이 신문은 후에 <더 태틀러(The Tatler)>라는 최초의 근대 잡지가 되었다.
영국에서 일반인을 위한 우편 서비스(Royal Mail)가 처음 시행된 것은 1635년 찰스 1세 때였다. 하지만 당시 우편 서비스는 우편물을 수집해 마을 간 운송까지만 담당했다. 1680년 윌리엄 도크라(William Dockwra)와 로버트 머레이(Rober Murray)가 사설 우편 서비스 ‘ 런던 페니 포스트(London Penny Post)를 만들면서 런던과 근교 지역에 한해 개별 배송이 이루어졌다. 커피하우스를 거점으로 우편물을 접수하고 배달하는 유료 배송 시스템을 만든 것이다. 이를 계기로, 지역마다 커피하우스를 중심으로 페니 포스트가 등장했고, 1765년 영국 의회에서 영국 전역의 페니 포스트 설립을 허가했다.

한편, 영국이 세계 금융의 중심지로 성장하는 데도 커피하우스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16세기 런던에 왕립 증권거래소(Royal Exchange)가 처음 설립되었으나, 출입을 허가 받지 못한 증권 중개인들이 런던의 커피하우스를 중심으로 증권 거래를 진행하면서 주식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날 세계 최대의 보험회사로 꼽히는 로이드(Lloyd) 또한 출판인 에드워드 로이드(Edward Lloyd)가 런던에서 운영하던 커피하우스에서 시작됐다. 로이드가 커피하우스의 주 고객층이던 선원, 선박 주인, 상인들을 대상으로 신문을 발행해 해상보험과 무역 관련 이슈를 다루면서 보험회사의 기반을 마련한 것.
이처럼 영국의 커피하우스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인 남성들을 통해 각종 정보와 아이디어가 퍼져나가며 영국 근대화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후 커피하우스가 남성들만의 전유물로 여성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서 급속한 쇠퇴기를 맞는다. 1793년에는 551곳으로 수가 크게 줄었고 티하우스에 그 자리를 내주면서 영국의 커피하우스는 역사의 한편으로 물러나게 된다.
piux
브랜드와 커피에 진심인 카페지기,「커피오리진」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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