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향이 깃든 혁명파리의 카페와 프랑스 혁명
piux22. 05. 06 · 읽음 569

1669년 7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술탄은 프랑스 파리에 솔리만 아가(Süleyman Ağa) 대사를 파견한다. 유럽 대륙 정복을 위한 첫 번째 빈 함락(1529년)이 실패한 뒤 다시 한 번 빈을 노리고 있을 때였다.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오스만 투르크 군이 합스부르크 왕가의 본거지 빈을 공격할 때 프랑스가 지원군을 보내지 않도록 불가침 조약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그는 파리에 머무는 동안 프랑스의 왕족과 귀족을 회유하기 위해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손님들은 반짝이는 벽 타일과 향기로운 목재, 오스만 투르크에서 제작한 값진 카펫으로 꾸민 방으로 안내되었다. 종유석으로 꾸민 벽면, 아름다운 무늬로 장식한 반구형 천장이 그들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몰약의 진한 향이 후각을 매료시켰다. 초대받은 이들이 동방의 신비로운 매력에 젖어 들 때쯤 한쪽에서 투르크 의상을 입은 흑인 노예가 이브릭(Ibrik)을 들고 나타나 커피 접대를 했다. 커피의 고소한 향과 함께 곁들여진 설탕의 달콤함이 어우러지면 분위기는 한층 고조되었다. 

이때 경험한 설탕을 곁들인 커피는 모두에게 향긋한 기억과 달콤한 유혹으로 남았고, 대사가 고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이 신비로운 커피 접대에 대한 이야기는 파리의 귀족뿐 아니라 서민에게도 퍼져 나갔다. 솔리만 아가가 파리에서 보낸 6개월은 새로운 파리 카페의 원형이 잉태되는 시기였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672년. 커피는 파리에 빠르게 퍼지기 시작한다. 생 제르맹(St. Gemain) 시장 광장에 최초의 카페가 문을 열었다. 박람회장에 들어선 간이 판매대 형식이었다. 파리에서 카페가 성공하려면 커피 외에 다른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챈 이가 있었으니, 이탈리아 시칠리아 출신의 셰프 프로코피오 콜델리(Procopio de Coltelli)였다. 그가 1686년 프랑세스 극장(Le Théâtre-Française) 맞은편에 오픈한 카페 프로코프(Café Procope)는 편안한 분위기의 공간에서 불특정 다수가 모여서 교류할 수 있는 순수 유럽식 카페였다. 18세기 모든 카페가 여기서 파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카페 프로코프의 단골 중엔 미국의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도 있었다. 1776년 주불 대사로 파견된 그는 미불공수동맹(美佛攻手同盟) 조약을 성공적으로 체결하면서 미국 독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한편 프랑스는 미국 독립전쟁(1775~1783)에 과도한 군사비 지원으로 재정난에 빠졌고, 프랑스 시민 계급은 미국 독립 전쟁을 보며 자유를 갈망했다. 이 시기 팔레 루아얄(Le Palais-Royal) 일대에는 전에 없이 생동감이 넘쳐났다. 사람들이 몰려나와 거리의 커피 행상이나 카페에 모여 커피를 마시며 의견을 나누었다. 1761년 이후 20년간 폭등한 빵값과 1787년 이후 거듭된 흉작으로 당시 프랑스 전체 인구 85퍼센트를 차지하는 농민은 강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 국민 대부분이 속한 제3신분 시민들은 카페에서 뉴스를 듣고 토론을 하는 것이 일상이 된다. 

유례없는 카페 호황에 새로운 카페가 하나둘 등장하고 카페마다 각기 다른 성향의 모임이 생겼다. 카페 데 아뵈글(Café des Aveugles)은 맹인(aveugle) 악단이 나와 무능한 왕정을 비꼬았고, 카페 베르(Café Vert)에선 원숭이를 훈련시켜 귀족들을 풍자했다. 그중에서도 팔레 루아얄 인근의 카페 뒤 포아(Café du Foy)를 드나드는 단골은 가장 과격한 집단에 속했다. 파리 이외 지역에서 온 지식인, 일거리 없는 변호사, 의사, 문인, 배우 등이 이런 분위기를 주도하는 데 일조하고 있었다. 불만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다 급기야 1789년 7월 12일, 혁명파 저널리스트였던 카미유 데물랭(Lucie Simplice Camille Benoist Desmoulins)은 카페 드 포아의 탁자 위로 올라가 찢어진 나뭇잎을 자신의 모자에 붙이고 군중을 향해 외쳤다. “귀족에 대항해서 무기를 잡자!” 

1789년 7월, 시민 봉기를 선동한 카미유 데물랭. ⓒ piux

이틀 후 7월 14일 아침, 파리 시민은 혁명에 필요한 무기를 탈취하기 위하여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고 이 사건은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파리의 카페는 군중이 모여 커피를 마시며 자유와 평등 사상을 논하며 들고 이를 쟁취하기 위해 들고 일어난 혁명의 중심지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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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와 커피에 진심인 카페지기,「커피오리진」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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