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의 섬, 암태도는 2019년 4월 4일 천사대교 개통으로 육지인 목포와 연결됐다. 또 팔금도와 안좌도, 자은도 세 개의 섬은 이미 암태도와 다리로 이어져 있었으니 이제 이 4개의 섬은 모두 육지로 통한다. 천사대교가 개통되면서 암태도에도 새로운 명소들이 생겼다. ‘동백 파마머리’ 벽화도 그중 하나다. ‘동백 파마머리’ 벽화는 기동 삼거리 손석심 할머니 댁 담장에 있다. 파마를 한 듯한 머리 부분은 그림이 아니라 실제 애기동백나무다. 얼굴 부분만 벽에 그렸다. 꽃이 피는 시절이면 영락없이 ‘동백꽃 파마머리’가 된다. ‘파마머리’를 한 노부부가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은 그냥 보고만 있어도 즐거워 배시시 웃음이 나온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고작 20명의 섬 주민이 왜구 해적선 9척과 맞서 싸워 승리했다는 놀라운 기록이 남아 있다. 이 기록을 보고 눈을 의심했다. 왜구 해적선의 경우 대선은 300여 명, 중선은 100~200명, 소선도 40~80명이 승선한다. 소선이라도 9척이면 최소 300명 이상은 될 터인데, 열 배가 넘는 잔인한 해적들을 고작 20여 명의 섬사람들이 어찌 이길 수 있었단 말인가? 심지어 정규군이 아니라 무기도 변변찮았을 것이다. 이 놀라운 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인공은 바로 암태도 사람들이다.

일제 강점기 전국적 농민항쟁의 도화선이 된 농민항쟁의 발화점 또한 암태도였다. 섬 주민들은 추수거부, 소작료불납동맹, 아사동맹으로 악덕 지주와 맞서 싸웠다. 1,000명의 주민들은 목포로 나가 경찰서 앞에서 아사동맹(단식투쟁)으로 저항했고 마침내 승리했다. 이것이 암태도 ‘소작쟁의’다. 이 항쟁의 뿌리가 왜구와 일당백으로 싸워서 승리한 역사 속에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팔금도는 매도, 거문도, 거사도 등 8개 섬이 간척되면서 하나의 섬으로 재탄생했다. 팔금면 소재지인 읍리 마을 초입에 있는 3층 석탑은 고려시대 초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 석탑은 1942년 발견 당시에는 5층이었는데 일부가 소실되고 지금은 3층 석탑으로 남았다. 석탑의 존재는 고려시대 초기 당시 제법 규모가 큰 사찰이 있었다는 증거다. 사찰의 흔적 또한 이곳을 운영할 수 있는 세력이나 집단이 섬에 있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지금은 쇠락한 팔금도가 그 옛날에는 제법 융성했던 것이다.

안좌도는 수화 김환기(1913-1974) 화백의 고향이다. 안좌도 읍동 마을에는 그가 살던 집이 국가민속문화재 제251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안좌도 대리마을 들녘 한가운데는 2개의 남근 바위가 우뚝 서 있고 그 옆에는 400년 역사의 팽나무 숲이 있다. 이 숲은 북서풍을 막아내기 위해 조성된 방풍림이다. 팽나무는 유독 바닷가에서 잘 자라서 포구나무라고도 한다. 120여 그루의 팽나무 고목이 숲을 이루고 있는 모습은 경이롭다.
자은도는 면적 52.790제곱킬로미터로 신안군의 면 단위 섬 중에서 가장 크다. 모래 해변이 무려 9개나 되는데, 그중 하나인 분계해변에는 여인송이란 소나무가 있다. 여인의 자태를 그대로 빼닮았다 해서 여인송이다. 옛날 분계 마을에 금슬이 좋은 어부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부부 사이에 작은 말다툼이 벌어졌고, 남편은 홧김에 배를 타고 떠나버렸다.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다 아내는 점차 미쳐 결국 소나무에 매달려 있다 떨어져 죽고 말았다. 뒤늦게 돌아온 남편이 나무 밑에 아내를 묻어주었고 그 후 소나무는 거꾸로 매달린 여인의 모습으로 변해 어부의 아내가 환생한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가는 방법 : 목포와 암태도는 천사대교로, 암태도와 나머지 3개의 섬은 다리로 이어져 있어 모두 자동차로 이동이 가능하다.
강제윤
강제윤은 시인이며 섬연구자다. 사단법인섬연구소 소장, 인문학습원 섬학교 교장, 국립 한국섬진흥원 이사 등으로 활동하며 <섬을 걷다>, <당신에게 섬>, <섬 택리지> 등 다수의 저서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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