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에는 우롱차봄비의 싱그러운 기운에 우롱의 향을 곁들이다
인선22. 06. 10 · 읽음 1,495

절기로는 아직 이른 봄인데 신기하게 포근한 날이었다. 작은 선방의 창을 모두 열자 기분 좋은 바람이 들어온다. 스님의 다실 정면에 나 있는 창 너머로 사찰의 정경과 북한산 능선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측면 창 밖의 숲은 계절의 분위기를 시시각각 전한다. 어느새 보슬보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소리가 좋네요.” 

흙바닥과 처마로 떨어지는 빗소리는 도시에서 들을 때보다 한층 경쾌하다. 

“빗소리는 마음이 고운 사람 귀에만 들린대요.”

ⓒ 여인선

빗소리 듣는 사람의 감성을 적셔주는 스님의 한마디에 마시던 차가 더 따뜻해졌다.
 나도 마음이 소란스러워 창 너머 빗소리를 무시한 적이 많았을까. 빗소리가 들리는 사람에게는 빗방울도 보인다. 유리창에 맺힌 빗방울은 아무것도 없던 허공을 두드리는 에너지로 채워버린다. 거리의 색은 더 진해졌고, 축축해진 세상은 아예 다른 물성으로 바뀐 느낌이다. 허공에 떠도는 습기에 따뜻한 향기를 입히고 싶다. 비 오는 날엔 선향을 피우기도 하고, 향이 좋은 우롱차를 즐겨 마신다. 산뜻한 청향의 우롱차가 바이올린 소리를 떠올리게 한다면, 그윽하고 은은하게 다가오는 농향의 우롱차는 첼로나 콘트라베이스의 음과 어울린다. 그중에서도 중국 우이산 바위에서 자라는 무이암차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처럼 더 묵직하게 깔리는 느낌이다. 비 오는 날 어둑한 분위기에 제격이다.

ⓒ 여인선

이번 봄비는 오랜 가뭄 뒤에 내려서 유독 반가웠다. 산간 지방의 야속한 산불도 비와 함께 사그라들었다. 지루한 회사 안이지만 사무실에서 들리는 빗소리가 기분 좋다. ‘북두(北斗)’라는 이름의 아끼던 무이암차를 꺼낸다. 매일 마시는 아메리카노와 비교할 수 없는 우아한 향기에 마음이 말랑해진다. 암골화향(岩骨花香). ‘암석의 기운을 뿜어내고 향긋한 꽃 향기를 밴 특별한 차’라는 뜻으로, 무이암차의 향기를 표현할 때 쓰는 말이다. 매일 마시기엔 아까운 좋은 차라, 이렇게 가끔 비 오는 날 꺼내 마시거나 귀한 손님이 오면 내어드린다. 

“나이가 들수록 하루하루가 맛있어. 꼭꼭 씹어 먹고 있어요.” 

ⓒ 여인선

그날 사찰에서 스님은 겨울의 끝자락 숲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루하루가 맛있는 삶은 달력보다 먼저 바뀌는 계절을 느끼고 알아채는 일일까, 비 올 때 빗소리를 듣고 빗방울을 보는 일일까, 아껴 두었던 차를 꺼내는 일일까. 겨울 가고 다시금 봄이 오는구나. 새삼 봄비를 느끼며, 찻잔에 남은 근사한 향기에 나의 오후도 맛있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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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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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A 앵커. 바쁜 일상 속 차를 마시는 시간으로 위로를 얻습니다. 책 <차라는 취향을 가꾸고 있습니다>를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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