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여행 중 호텔 조식 뷔페에서 글루텐 프리 코너를 마주할 때면 궁금해집니다. 글루텐 프리 식품을 먹으면 더 건강해질까? 인터넷에 찾아보면 체중 감량, 건강 증진, 장 건강 증진에 운동능력 향상까지 글루텐 프리 식단의 긍정적 효과에 대한 다양한 주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글루텐이 뭐길래 그런 이야기가 나온 걸까요?
글루텐은 밀, 보리, 호밀과 같은 곡물에 들어있는 식물성 단백질입니다. 다른 곡물보다 특히 밀에 많이 함유돼 있는데, 밀 단백질의 75~80퍼센트가 글루텐입니다. 글루텐을 처음 발견한 건 6세기 중국의 국수 제조자들입니다. 밀가루 반죽을 치대면서 계속 힘을 가하면 반죽의 탄성이 점점 더 강해집니다. 이 반죽 덩어리를 물에 살살 씻어내면 숨어 있던 글루텐 구조물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끈적이면서 탄성이 있는 글루텐 덩어리는 씹는 맛이 고기와 비슷해 아시아 여러 나라의 요리에서 고기 대용물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서구에서 오래 전 밀을 주요 곡물로 선택한 이유도 글루텐 때문이라고 믿는 전문가가 많습니다. 공기를 품어 폭신하게 부풀어 오르는 빵을 만들기에 가장 적합한 곡물이 밀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글루텐이 처음 건강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된 건 셀리악 병 때문입니다. 셀리악 병은 글루텐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으로, 구역, 구토, 설사와 같은 소화장애를 일으키는 면역 질환입니다. 장이 손상되고 영양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하여 체중이 줄어들고 골다공증까지 생길 수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인구의 약 1퍼센트가 셀리악 병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해외에서 글루텐 프리 식품을 찾기가 더 쉬운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극히 드문 질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여러 해 동안 밀가루 속 글루텐이 건강을 위협하는 적처럼 지목되어 왔습니다. 의료계 일부에서 글루텐이 독성 물질이며 만병의 근원이고 심지어 뇌의 노화까지 일으킨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셀리악 병처럼 심하진 않지만 글루텐이 들어간 곡물 음식을 섭취하면 속이 불편하다는 사람들의 증언도 그런 주장에 힘을 실어줬습니다. 하지만 호주 모나시 의과대학 연구 결과, 이 같은 증상이 글루텐과는 무관하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참가자들의 증상은 실제 글루텐 때문이 아니라 글루텐이 몸에 좋지 않다는 믿음 때문이었다는 설명입니다.
밀 품종이 개량되면서 글루텐 함량이 높아졌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이 역시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독일 과학자들이 1891년부터 2010년까지 지난 120년 동안 밀 농사에 사용된 60종의 밀 품종을 조사한 결과 글루텐 함유 비율은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반면, 단백질 함량은 과거보다 요즘 품종이 조금 낮았습니다. 이런 연구 결과는 요즘 밀가루에 글루텐 함량이 높아져서 셀리악 병과 같은 면역 질환이 증가한다는 주장에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점을 암시합니다.
아주 적은 양의 글루텐도 피해야 하는 셀리악 병 환자가 아닌 이상 우리나라에서 글루텐 프리 식단을 따르는 건 별로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쌀에는 글루텐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메밀이나 옥수수에도 글루텐이 함유돼 있지 않습니다. 밀, 호밀, 보리만 피하면 됩니다. 물론 그렇게 먹는다고 해서 특별히 더 건강해지거나 체중이 줄거나 또는 장 건강이 향상된다는 근거는 아직 부족합니다. 세상에는 밀가루 음식 말고도 나를 살찌게 할 수 있는 음식이 너무 많습니다. 게다가 글루텐 프리 빵이 밀가루 빵보다 영양 구성면에서 낫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글루텐이 빠진 자리를 설탕, 지방으로 대신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믿기지 않는다면 케이크나 쿠키를 생각해보세요. 글루텐 함량이 낮은 박력분을 사용하지만 절대 저칼로리라고 보기는 어려운 간식입니다. 평소 밀가루 음식을 많이 먹던 사람이라면 밀가루 음식을 적게 먹어서 체중이 줄 수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건 글루텐 프리 다이어트의 효과가 아닙니다. 그냥 음식 섭취량이 줄어들어서 그런 겁니다.
음식 속 한 가지 성분을 건강의 적처럼 지목하는 제한 다이어트는 멋진 트렌드에 불과할 뿐 건강에 필요한 식단은 아닙니다. 진정으로 멋진 식단은 불필요한 걱정 없이 식사하는 스트레스 프리 다이어트가 아닐까요?
정재훈
약사이자 푸드라이터다. TV, 라디오, 팟캐스트, 잡지 등 여러 매체에서 음식과 약에 대해 과학적 시각으로 정보를 전하고 있다. 그동안 쓴 책으로 <음식에 그런 정답은 없다>, <정재훈의 식탐>, <정재훈의 생각하는 식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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