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불꼬불 골목 속 역사와 낭만봄날, 서울 서촌에서 윤동주 시인의 언덕까지
최갑수22. 08. 15 · 읽음 856

서촌을 찾은 건 옅은 봄비가 그친 뒤였다. 지하철 경복궁역에서 나오자 바늘 같은 봄햇살이 아스팔트 위에 내려 꽂히고 있었다. 서촌은 경복궁 서쪽에 있는 마을을 일컫는 별칭으로 통의동, 창성동, 체부동, 효자동, 누하동, 누상동, 옥인동, 필운동 일대를 일컫는다. 서촌으로 불리다가 2011년 종로구에서 세종대왕 탄신 614주년을 맞아 ‘세종마을’로 이름을 바꿨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위치한 북촌이 사대부를 비롯한 양반 집권 세력의 거주지였다면 서촌은 의관, 음악가, 화가 등 전문직 중인이 살았던 부촌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겸재 정선과 추사 김정희 등이 서촌에 살았고 근대에는 화가 이중섭과 이상범, 시인 윤동주와 이상 등의 예술가가 서촌 주민이었다. 겸재 정선의 명작 <인왕제색도>가 탄생한 곳도 바로 이 일대다.  

경복궁역 3번 출구로 나와 길을 따라가면 오른쪽으로 경복궁 영추문이 보인다. ‘가을을 맞이하는 문’이라는 뜻의 영추문을 지나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은 대림미술관. 대림미술관을 시작으로 영추문을 지나 류가헌까지 서촌의 전시 공간이 이어진다. 회화, 사진, 디자인 등 마음에 드는 전시가 있다면 불쑥 들어가도 좋을 듯싶다. 그중 보안여관이 있는 이 부근은 시인 이상이 그의 시 ‘오감도’에서 묘사한 막다른 골목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서촌 한옥마을. Ⓒ 최갑수
서촌 한옥마을. Ⓒ 최갑수
서촌 한옥마을. Ⓒ 최갑수
서촌 한옥마을. Ⓒ 최갑수
서촌 골목 풍경. Ⓒ 최갑수
서촌 골목 풍경. Ⓒ 최갑수
서촌 골목 풍경. Ⓒ 최갑수
서촌 골목 풍경. Ⓒ 최갑수

보안여관을 지나면 창성동 한옥마을이다. 사대문 안의 한옥 1,400여 채 가운데 300여 채가 서촌에 남아 있는데, 대부분 1910년대 이후 주택 계획에 의해 대량으로 지은 이른바 생활형 개량 한옥이다. 한옥마을에서 쌍흥문터, 해공 신익희 가옥을 지나 청운효자동 주민센터까지 가는 길은 거미줄처럼 얽힌 골목의 연속이다. 1990년대 말 건축 규제 완화로 서촌에 빌라들이 들어섰지만 골목만큼은 어릴 적 동네에서 만나던 정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고개를 조금만 들면 파란 하늘과 초록빛 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기와지붕을 타고 낮은 담장을 따라 고양이들이 산책을 다니기도 한다. 좁디 좁은 골목길이지만 마냥 답답하게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골목 구석구석마다 이런 소소한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리라. 

통인시장. Ⓒ 최갑수

우당기념관에서 필운대로를 따라 통인시장으로 내려가는 길도 재미있다. 옥인동, 누상동 주택가가 이어지는데 길 가에는 소박한 간판의 책방, 과일가게, 음식점, 카페 늘어서 있다. 통인시장은 서울 도심이 이런 시장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흥미진진한 공간이다. 반찬 가게, 생선 가게, 정육점, 옷 가게 등과 온갖 먹거리를 파는 가게가 모여 있다. 통인시장은 일제강점기인 1941년 지금의 자리에 들어섰고 한국전쟁 이후 체부동, 누하동 등으로 피난민이 모여들면서 규모가 커졌다. 

통인시장을 빠져나오면 옥인동과 누하동이다. 작은 집들이 사이좋게 어깨를 기대고 서 있고 조용한 듯 떠들썩한 곳이기도 하다. 마을버스가 부릉부릉 골목을 누비고 자전거 벨 소리도 따르릉 울린다. 서쪽 끝자락에 자리한 수성동까지 걸어보는 걸 추천한다. 수성동 계곡 입구에 들어서면 조선 중기 유명 화가였던 겸재 정선이 그린 진경산수화 중 <장동팔경첩 수성동>의 실사판을 볼 수 있다. 한 폭의 그림과 같은 경치를 보고 나면 서촌에 예술가들이 모일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서촌의 북쪽 자하문 고개에는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 있다. 언덕에 오르면 경복궁과 시청, 종로 일대와 N서울타워까지 바라보인다. 언덕 주변으로 잔디가 깔린 마당에 소나무를 식재해놓았고, 짤막한 산책로가 이어진다. 언덕으로 한양도성길이 지나가는데, 성곽 앞에는 소나무 한 그루가 서서 부암동과 평창동을 내려다본다. ‘윤동주 소나무’라고 불리는 이 나무 앞에 서면 멀리 북한산이 손에 잡힐 듯하다. 이곳에서 보는 야경은 아름답다. 해 질 녁, 하늘이 서서히 보랏빛과 주홍빛으로 물들 때쯤이면 도심의 빌딩에도 하나둘 불이 켜지고, 사위가 금세 어두워진다. 멀리 N서울타워의 불빛이 선명하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서 바라본 서울의 야경. Ⓒ 최갑수

이렇게 오래된 서울 속에서 빠져나와 서울을 바라보면 마음이 약간 느슨해진다. 한낮에는 열심히 살아야지 하며 이를 꽉 깨물었다가, 오후 네다섯 시만 되면 ‘열심히 사는 것보다는 즐겁게 사는 게 더 좋은 거 아니겠어’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게다가 이제 봄이 왔고 오늘은 봄비까지 내렸으니까 이 느슨한 마음의 상태를 좀 즐겨보는 게 뭐가 나쁘겠어’ 서울에 예쁜 불빛이 하나 둘씩 켜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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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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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여행작가. 아주 오랜 여행자다. 여행을 다니며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다. 그래서 이번 생이 약간 다행스럽고 행복하다고 여긴다. &ldquo;여행이란 뭘까요?&rdquo; 하고 묻는 이들에게 &ldquo;위로 아닐까요&rdquo;라고 대답한다. 여행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끌어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밤의 공항에서>, <우리는 사랑 아니면 여행이겠지> 등의 에세이와 시집 <단 한 번의 사랑>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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