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초라는 말을 쓰면 의아하다는 반응을 받곤 합니다. 식물을 관찰하고 그리는 제가 쓰리라 생각하지 못한 단어라 그런 듯합니다. 잡초라는 이름의 식물은 없는 데다, 식물을 그저 잡초라고 부르는 건 미안한 일이니까요. 그렇지만 우리는 때때로 잡초의 존재를 분명히 느낄 수 있습니다.
아름답게 가꾼 장미 정원, 그 한가운데에 자라고 있는 단풍잎돼지풀을 상상해 볼까요? 단풍잎돼지풀은 환경부에서 생태계 교란 생물로 지정했고, 인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그 이름은 널리 알려지지 않은 식물이지요. 이 식물은 잠깐 사이에 무성히 자라서 장미 생육을 방해하고, 사람들이 장미를 구경할 수 없게 가려버리는데다,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꽃가루까지 마구 뿌려댈 겁니다. 장미 정원의 관리자는 이름 모를 이 풀을 당연히 뽑아내야 하겠다고, 다시 말해 잡초라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잡초 취급을 받는 식물들은 분명히 우리 곁에 존재합니다. 앞서 말한 단풍잎돼지풀부터 환삼덩굴, 개망초, 망초, 미국쑥부쟁이까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종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잡초를 제거하는 데에 상당한 비용과 노력을 들이지만 완전히 없애지는 못합니다. 주기적으로 자르고, 뽑아내고, 제초제를 뿌려도 이내 다시 무성해지니까요. 이런 잡초들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을까요?

잡초를 뽑지 않으면 된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완전히 없애기 어려운 것이 잡초이지만, 의외로 그냥 내버려 두면 잡초는 없어집니다. 흔히 잡초 취급을 받는 식물, 그러니까 앞서 말한 개망초나 망초, 단풍잎돼지풀같은 식물을 떠올려볼까요? 이들은 끈질긴 생명력으로 어디에나 자라날 듯하지만, 깊은 숲속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상대적으로 작고 여린 이 풀들은 햇빛과 수분 그리고 양분을 차지하려는 식물 간의 경쟁에서 키가 크고 힘이 센 나무와 같은 식물에게 밀려날 수밖에 없거든요. 만약 우리가 잡초를 뽑아내지 않는다면, 이내 무성한 잡초밭이 될 겁니다. 그렇지만 그 후 나무가 한두 그루씩 들어오면서 조금씩 무성한 숲이 될 테고, 결국은 잡초가 자라날 수 없는 곳이 될 거예요.
이를 바꿔 말하자면, 우리가 어떤 땅을 잔디밭, 경작지 혹은 정원으로 가꾸고자 한다면 잡초를 피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다른 강한 식물들이 자라나기 어려운 환경, 그러니까 지속적으로 베이고 뽑혀 나가는 조건에 적응해 자라는 것이 잡초이니까요. 자연적인 교란, 그러니까 산사태나 홍수 등은 사람의 제초 작업보다 드뭅니다. 그러므로 만약 인간이 없었다면 잡초는 지금처럼 번성하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잡초라고 불리는 식물들은, 잡초 취급을 받으며 사는 것을 하나의 생존 전략으로 선택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잡초에게 미안한 마음
이렇게 잡초로서 성공해 번성하고 있는 식물들을 잡초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어려운 건 왜일까요? 그들의 생존 전략일지라도 함부로 뽑혀 나가는 모습을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과, 그저 잡초라고 뭉뚱그려 불리지만 제각각 이름을 갖고 있을 수많은 식물 종에 대한 애정 때문이리라 생각합니다.
요즘 잡초라고 불리는 식물들을 관찰하고, 공부하고, 글과 그림으로 옮기고 있습니다. 쑥, 애기똥풀, 꽃마리, 냉이 등. 한 종 한 종을 살피고 있으면, 잡초의 삶을 선택했지만 결코 잡초라는 단어 하나로 납작하게 압축할 수 없는 식물들이 보입니다. 이 작업이, 그저 잡초 취급을 받지 않기를 바라봅니다.
조현진
식물과 풍경을 그리는 일러스트레이터. 조경학을 전공했다. <식물 문답>을 출간했고, <환경과 조경>에 ‘풍경 감각’을 연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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