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된 인연을 떠올릴 때면 종종 그 시작을 생각하게 된다. 오래될수록 애틋하여 그 시작도 잊고 싶지 않아서다. 우리는 무엇으로 이렇게 끈끈하게 엮였을까? 인연이 오래될수록 시발점을 기억하기 어렵다. 그때마다 자문했다. 우리의 시작이 어땠길래 이토록 오랜 세월 친구 혹은 연인일 수 있을까? 어떤 운명이길래 여태껏, 그리고 여생 동안 가족일 수 있을까? 나의 경우는 대체로 평범한 계기가 시작이었던 것 같다. 물론, 누군가는 나와 달리 범상치 않은 계기로 오래갈 인연을 시작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궁금해진다. 농산물과 인간이 맺은 인연의 시작은 어땠을까? 분명 블루베리와의 인연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 계기로 시작된 듯하다.
공기를 찢는 포탄 소리와 땅을 움푹 파고도 남은 여력이 땅을 뒤흔드는 폭발. 콩알만 한 탄환이 인간의 팔다리를 찢고 내장을 터뜨리는 참상. 사방에서 터지는 비명과 까맣게 타버린 수목 위를 덮은 피. 세상이 말 그대로 지옥도를 그리던 때가 있었다. 이를 배경으로 하는 블루베리 일화를 생각해보면, 블루베리의 파랑이 어찌 보면 파랗게 식어버린 육신을 떠올리게도 한다.

2002년 미국 <타임지> 선정 세계 10대 슈퍼푸드인 블루베리가 눈에 좋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정확하게는 블루베리에 다량 함유된 안토시아닌(anthocyanin) 성분이 시력 개선에 도움을 준다. 망막에서 시각에 관여하는 로돕신(rhodopsin)이라는 색소체는 우리가 눈을 사용하는 동안 서서히 분해되는데, 이때 안토시아닌이 로돕신의 재합성을 촉진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연구를 통해 밝히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 바로 제2차 세계 대전이다. 당시 영국의 한 공군 조종사가 빵에 블루베리를 빵 두께만큼 발라 먹고 출격했더니 “희미한 빛 속에서도 물체가 잘 보였다”라고 증언하면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고, 실제로 블루베리가 시력 개선에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블루베리의 본격적인 상업화도 이때 시작되었다.
사실 블루베리를 처음 식용으로 쓴 건 북아메리카 대륙 원주민이었다고 한다. 유럽인이 이주해오기 오래전부터 이들은 야생 블루베리를 식용과 약용 작물로 활용했다. 당시 원주민들은 블루베리가 배고픔에 허덕이던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신이 내린 선물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나는 블루베리와 인간의 진정한 인연이 세계 대전 이후 시작했다고 말하고 싶다. 본격적인 대중화로 보다 많은 사람들이 블루베리와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게 그때부터기도 하고, 그 기억을 더 오래 간직하고 싶어서기도 하다. 결코 아름답지 않은 시작이다. 보복을 위해서였든, 살기 위한 선제 타격이었든,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날아오른 하늘에서 블루베리 효능의 실마리가 태어났고, 그것이 우리 인연의 시초가 되었다. 비극적이고도 평범하지 않은 인연.
앞서 나는 오래된 인연일수록 애틋해 그 시작도 오래 기억하고 싶다고 썼다. 블루베리와 나의 관계가 애틋한 건 아니나, 그럼에도 그 같은 시작은 결코 잊고 싶지 않다. 어떤 인연도 다시는 그런 계기로 시작하고 싶지 않으므로.
전성배
안녕하세요. 전성배입니다. [격간隔刊 전성배 산문]의 연재자이며, 지은 책으로는 <계절을 팔고 있습니다>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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