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파의 일화초여름 남해안에서 수확하는 달콤한 황금 과일
전성배22. 05. 25 · 읽음 6,049

봄과 여름 중 어느 계절로도 명확하게 규정하기 어려웠던 3년 전 초여름이었다. 달력은 4월에서 요지부동이었다. 아직 입하가 지나지 않은 시기라서 엄밀히 말하면 봄이었으나, 더운 날씨가 계속되던 터라 나는 일찌감치 계절을 초여름이라 이름 지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짭짤이’라 불리는 대저 토마토 판매에 한창이기도 했다.

짭짤이가 무엇인가. 봄의 전령이라 불릴 정도로 봄과 유대가 깊어, 봄이 시작하는 2월부터 길게는 5월 초・중순까지 짭짤이 판매에 온 정신을 집중해야만 했다. 당시 나는 제철 과일을 주로 판매하며 연명하고 있었기 때문에, 짭짤이의 판매 성과는 특히나 내게 있어 죽고 사는 문제였다. 계절을 초여름이라 불러도 오른손으론 봄의 옷자락을 끈질기게 붙들고 살았던 것이다. 제철 과일 하나에 생계를 맡기고 있다는 사실에 따르는, 다음 과일에 대한 부담감을 왼손에 쥐고. 조금이라도 소싱이 늦으면 판매에 차질이 생겨 밥을 굶을 수도 있었다. 다행히 4월 말에 전라남도 완도군의 한 농부와 긍정적인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이번에는 비파였다.

ⓒ 전성배

비파는 당시 내게 생경한 과일이었다. 아주 잠깐, 살구의 별칭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게 비파와 살구는 외형뿐만 아니라 수확기도 6월 전후로 비슷했기 때문이다. 농부는 나의 낯섦이 익숙하다는 듯 비파에 대한 설명을 들려주었다. 비파는 아열대성 작물로, 겨울철 낮은 온도에서는 동해(凍害)가 쉽게 발생한다고 한다. 비교적 추위를 잘 견디는 살구와 첫 번째로 다른 점인데, 이 때문에 11월에 꽃이 핀 뒤 열매를 맺을 때쯤 찾아오는 겨울에 열매가 쉽게 죽어버린다고 한다. 비파가 생경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완도처럼 기후가 온난한 지역에서만 겨우 연명하는 수준이었기에.

그러던 비파가 최근 양상이 바뀌었다. 몇 차례 매체에 소개되면서 소비자의 관심이 크게 늘더니 이제는 새로운 소득 작물로써 각광받기 시작했다. 시설 재배가 적극 도입되면서 품질 좋은 비파를 보다 안정적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에 전남 농업기술원도 꾸준히 신품종을 육성해 보급하고 있어 앞으로의 전망은 더 밝다며 농부는 미소 지었다. 하지만 나의 불안감을 완전히 해소할 수는 없었다. 여전히 인지도 높은 과일을 판매하는 게 훨씬 더 좋을 것 같았다. 소비자가 잘 모르는 과일을 구태여 설명해 팔기보다는 이미 잘 아는 과일을 파는 게 서로에게 편할 것이므로.

“에이, 모르는 소리입니다. 얼마 전에 또 방송국에서 촬영해 갔는 걸요? 말씀처럼 지금은 생소한 분이 더 많을지도 모르지만, 비파를 먼저 찾는 소비자는 앞으로 더 늘 거라 장담합니다. 한번 팔아보시죠.”

ⓒ 전성배

결국 나는 비파를 팔아보기로 했다. 며칠에 걸쳐 상품을 촬영하고, 상세 페이지를 제작하고, 관련된 이야기를 쓰는 등 판매를 위한 사전 작업을 했다. 그리고 그맘때,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비파를 소개하고 있었다.

“과일계의 황금이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6시 내고향입니다!”

그 방송이 농부가 말했던 그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방송이 나간 직후 거짓말처럼 비파를 찾는 전화가 쇄도했다. 소싱할 당시 농부가 했던 말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한번 팔아보시죠.” 나는 그날 첫 주문을 넣었을 때 농부의 선견지명에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그에게 고마운 날들이 꼬박 한 달이나 이어졌다. 덕분에 그해 여름은 배부를 수 있었다. 그간 과일을 팔며 겪었던, 몇 안 되는 배부른 순간들의 맨 꼭대기를 차지하는 일화다.

지금은 과일 파는 일보다 농부의 이야기를 쓰는 일에 더 많은 시간과 기운을 쓰고 있지만, 요즘도 종종 비파의 일화를 떠올린다. 내가 농부의 이야기를 쓰는 건 농부, 나아가 우리나라 농업에 도움이 되길 바라기 때문이다. 아직 성과는 미미하다. 무명의 내가 가진 영향력이 그만큼 부족하기 때문일 테다. 반면 대형 미디어는 나의 꿈을 수천, 수만 배는 더 크게 이룰 수 있는 힘을 지녔다. 나는 그 거대함에 시기하기보다는 간절히 요청하고 싶다. 우리 땅에서 자라는 우리 농산물을 주기적으로 소개해주기를. 그때마다 관심 속에 불티나게 팔릴 수 있도록 침이 마르게 칭찬해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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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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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전성배입니다. [격간隔刊 전성배 산문]의 연재자이며, 지은 책으로는 <계절을 팔고 있습니다>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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