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뜰을 떠올리며, 소수서원옛 절터에 서원이 들어서기까지
이여름22. 09. 13 · 읽음 49

순흥 안씨 성을 지닌 나는 소수서원 덕분에 처음으로 순흥 땅을 밟게 되었다. 몇 대손인가 하는 물음이 큰 의미 없는 시대에 살지만, 가끔 그 뿌리라는 것이 궁금해질 때도 있는 법이니까. 뿌리, 개인의 탄생 이전에 존재하는 얼마만큼의 역사를 나의 뿌리로 한정할지는 그 경계가 꽤 모호하다. 나는 그것이 아주 막연하고 희미하게만 느껴져서, 괘씸하게도 그게 그저 환상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고 오랫동안 생각했다. 그러나 여행은 종종 삶을 투영한 짧은 판타지가 되어 삶을 변주하기도 한다.

 ⓒ 안수향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소수 서원. 고려 시대에 성리학이라는 신학문을 배워 오신 나의 할아버지의 영정이 바로 이곳에 모셔졌다. 중종 37년(1542), 당시 풍기 군수였던 주세붕은 평소 존경하던 ‘안향(安珦)’ 선생, 그러니까 내 할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사우를 세웠다. 그리고 그다음 해, 사우 바로 옆에 유생이 학문을 배울 수 있는 공간을 짓고 ‘백운동 서원(白雲洞 書院)’이라는 근사한 이름까지 선물했다. 단순히 건물을 짓는 데에 그치지 않고 제향과 교육을 위한 재정 기반, 유생들이 볼 서책을 마련하고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본격적으로 마련하기에 이른다. 모든 것이 관학 중심이었던 시대에, 이곳에 세운 수준 높은 사립학교의 존재는 당대 어마어마한 이슈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후 1550년(명종 5년)에 퇴계 이황 선생이 풍기 군수로 있을 때 적극적으로 왕에게 요청하여 공식적으로 인가받기에 이른다. 명종이 직접 하사한 사액을 받으면서 서원은 공식적인 사학 기관으로 승격했다. 동시에 땅과 서책, 관리인까지 나라에서 지원받게 되었다. 백운동 서원은 이제 이름을 달리하여 ‘소수 서원(紹修書院)’으로 존재한다. ‘소수(紹修)'는 ‘자기 내적 수양을 통하여 유학의 정신을 이어간다'는 뜻이다. 10명의 입학생으로 시작했던 소수서원은 1888년까지 모두 4,300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 안수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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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 하나가 든다. 왜 하필 이 자리였을까? 안향 선생이었을까? 그저 안향 선생이 나고 자란 고향이었기 때문일까? 나는 입구에서 마주한 4미터 높이의 당간지주를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했다. 당간지주가 있다는 건, 절이 있었단 뜻이다. 자료를 들여다보니 이곳은 통일신라 시대에 지어 고려 때까지 크게 융성했던 ‘숙수사'의 절터였다. 군수로 막 부임하여 이곳을 둘러본 주세붕이 당시 목사였던 안휘에게 보낸 편지에는 숙수사의 옛터가 무척 운치 있고 아름다워서, 마치 중국 장시성의 백록동(白鹿洞)이 떠오른다고 극찬하는 내용이 있다. 당시 이미 숙수사는 절터만 남아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편지에서 언급되는 백록동 서원은 주자(朱子)가 그의 가르침을 전한 곳이기도 하다. 구름이 낮게 낀 이곳 풍경을 바라보며 주세붕은 백록동에 견주어 마땅하니, 이 터를 ‘백운동(白雲洞)'으로 일컫고자 한다며 편지에 서원 건립의 뜻을 내비친다. 자료를 좀 더 찾아보니 숙수사에서는 안향 선생이 어릴 적 몇 년 동안 노닐며 학문을 닦았다고 한다. 이 멋진 스토리를 이어 서원 건립의 당위로 탄탄하게 세운 데 감탄했다. 백록동과 주자. 그리고 성리학, 안향, 순흥, 숙수사 옛터. 이 얼마나 멋진 연결 고리인가. 생각해 보니 나라를 세운 근간이 되는 학문을 조선에 선물하셨으니 내 할아버지를 위해 조선은 이 정도 선물을 다시 돌려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소수서원엔 객이 많다. 아이들이 단체로 소풍을 온 모양이다. 뜰. 부처님을 기리던 뜰, 한 학자와 여러 정치가의 추억이 남은 뜰, 그리고 그 추억을 들추어 보고자 하는 이들로 가득한 오늘 이곳의 뜰. 그러나 형태는 시대를 기억하되 가둘 수는 없다. 보고 생각하더라도 느끼는 건 사사로운 경험의 도움이 필요하다. 오늘 나의 사사로움은 어쩌면 저 아이들이 이룬 풍경 속의 나에게 있고, 그 덕분에 문득 아주 멀게만 느껴졌던 대상이 오늘은 훨씬 가까워진 기분이다. 희한하게도 나는 진짜 내 할아버지의 오래전 뜰과 어떤 장면 하나를 떠올리고는 오래 추억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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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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