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들의 꽃 크기는 종마다 다릅니다. 식물체 크기가 몇 밀리미터에 불과한 좀개구리밥은 확대경 없이는 보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꽃을 피우는데요, 크기도 크기지만 꽃잎 한 장 없이 수술이나 암술만으로 이루어진 꽃의 구조도 신기하죠. 반면 모란이나 연꽃 같은 식물은 두 손에 가득 차고도 남을 만큼 큰 꽃을 피웁니다. 말 그대로 티끌보다 작은 좀개구리밥의 꽃도 우리가 몰랐던 작은 세계를 보여주는 아름다움이 있지만, 모란과 같은 큼직한 꽃은 확실히 시선을 빼앗아가는 아름다움이 있죠. 여기서 문득, 궁금해집니다. 지구에서 가장 큰 꽃을 피우는 건 어떤 식물일까요? 우리의 시선을 단번에 빼앗을 이 꽃은 어떤 세계를 보여줄까요?
애니메이션 속 라플레시아와 실제 라플레시아
지구상에서 가장 큰 꽃은 라플레시아입니다.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와 보르네오 섬에 자라는 식물인데요, 마치 정육점에 진열된 고기처럼 붉은 바탕에 흰 무늬가 있는 거대한 꽃을 피웁니다. 이 꽃의 지름은 무려 1미터, 무게는 11킬로그램에 달해요. 이 꽃 앞에서는 늠름한 위용을 자랑했던 모란이나 연꽃이 무척 왜소해 보일 듯합니다.
그런데 이 식물이 낯익지 않으신가요? 아마 많은 분들께 애니메이션 <포켓몬스터>에 등장하는 포켓몬 ‘라플레시아’로 익숙하실 거예요. 이 포켓몬은 실제 식물 라플레시아를 모델로 만들어진 캐릭터거든요. 그래서 생김새뿐 아니라 습성도 꽤 닮았는데요, 포켓몬과 실제 식물을 비교해 볼까요?
포켓몬 라플레시아는 잎사귀 한 장, 가지 하나 없이 핀 빨간 꽃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요, 이 점이 식물 라플레시아와 꼭 같습니다. 가상 생명체인 포켓몬은 잎사귀나 줄기가 없어도 이상하지 않지만, 살아있는 실제 식물인 데다 세상에서 가장 큰 꽃을 피우려면 많은 양분이 필요할 텐데 왜 꽃이나 줄기가 없을까요? 그 비밀은 바로 기생에 있습니다. 라플레시아는 스스로 광합성을 하지 않고 인도밤나무덩굴이라고 하는 포도과 식물에 기생해서 모든 양분을 얻거든요. 거대한 꽃을 피우는 데 필요한 양분을 전부 기생을 통해 충당하다니. 조금은 얌체 같은 식물로 느껴지지만, 다행히 기생당한 식물이 말라죽지는 않는다고 해요. 또, 자연계를 윤리의 기준으로 측정할 수는 없고요.
라플레시아의 진화 전 단계인 포켓몬 ‘냄새꼬’는 악취가 난다는 설정이 있는데요, 이 역시 실제 식물의 특징을 가져온 것입니다. 라플레시아는 실제로 고기 썩는 냄새를 풍기거든요. 좋은 꽃향기가 아니라 악취를 풍기는 게 의아하지요? 이건 벌이나 나비가 아니라, 동물의 사체에 꼬이는 파리와 딱정벌레를 유인해 꽃가루를 주고받기 때문입니다. 앞서 라플레시아의 꽃잎은 고기를 닮았다고 말씀드렸지요? 이 꽃잎의 색과 모양새 역시 파리와 딱정벌레를 유인하기 위한 형태이고요, 꽃 내부를 보면 마치 동물의 사체처럼 털이 숭숭 나 있기까지 합니다. 귀여운 포켓몬과 달리, 실제 라플레시아는 다른 식물의 양분을 빼앗아 살아가고 동물 사체를 의태한다니, 조금 으스스합니다.

만화 영화 바깥에서
라플레시아는 진귀한 꽃이기도 해요. 인도네시아 정부에서 지정한 희귀 식물인 데다 개화까지 약 1년 정도의 준비 기간이 필요한 반면, 막상 꽃이 피어 있는 기간은 일주일 남짓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세계에서 가장 크면서도 희귀한 이 꽃을 보러 온 관광객의 발길에 꽃봉오리가 훼손되는 경우가 많다고 하고요.
라플레시아는 억울한 식물이기도 합니다. 라플레시아 종류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프랑스의 탐험가 루이스 오귀스트 뒤샹인데요, 탐험 중 프랑스의 적국이었던 영국에게 그동안의 탐험 성과물을 빼앗겨버리고 맙니다. 이후 라플레시아를 만난 조셉 아놀드라는 영국인이 최초로 발견자로 알려졌고, 영국인 정치가 스탬포드 래플스의 이름을 따서 라플레시아라는 이름이 지어집니다. 뒤샹에게는 억울한 일이겠지요.
그렇지만 정말 억울한 사람들은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인도네시아 자생종에 영국 사람의 이름이 붙었으니까요. 참, 자생지인 인도네시아에서는 라플레시아를 ‘파드마’ 혹은 ‘케루부트’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조현진
식물과 풍경을 그리는 일러스트레이터. 조경학을 전공했다. <식물 문답>을 출간했고, <환경과 조경>에 ‘풍경 감각’을 연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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