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계절을 놓칠까 조마조마합니다. 식물을 충분히 관찰하고 기록해 두어야 정확한 정보를 담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데, 꽃은 며칠이면 피고 시들기 때문이에요. 게다가 기후 변화로 인해 이 시기를 맞추기가 더 어려워졌죠. 그래서 희귀한 꽃을 보러 멀리 떨어진 수목원을 방문할 때에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서 최신 꽃 소식을 찾아보거나, 수목원에 전화를 걸곤 합니다.
이런 면에서 장미는 참 마음이 놓이는 식물입니다. 장미꽃은 5월이 절정이어서 이때 장미 축제가 많이 열리긴 하지만, 꽃 잔치가 끝난 이후에도 몇 송이씩 꾸준하게 꽃을 피우거든요. 무더운 여름에도, 선선한 가을날에도, 그리고 강추위가 들이닥치는 겨울 초입까지도요. 게다가 서울 중랑천과 올림픽공원, 과천 서울대공원, 용인 에버랜드처럼 이름난 명소도 많고, 집 주변에도 크고 작은 장미원이 여럿 있어 손쉽게 만날 수 있고요.
그런데 조금 의아하지 않나요? 백일홍이란 화초가 있죠. 개화기가 무척 길어서, 꽃을 백일동안 볼 수 있다고 비유한 이름이 붙었습니다. 그런데 장미는 5월부터 11월까지 계속해서 피어나니까 약 210일이고, 이는 ‘백 일’의 두 배가 넘는 거잖아요?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일은 무척 에너지가 많이 드는 일일 텐데, 왜 장미는 백일홍보다도 훨씬 더 오랫동안 꽃을 피우는 걸까요?

품종 개량의 결과이다.
장미는 본래 여러 계절 꽃을 피우는 식물이 아니었습니다. 장미는 장미과 장미속에 속하는 식물들의 자연 교잡 혹은 인위적 교배를 통해 만들어져 온 재배 식물인데요, 이중 1800년대까지 개발된 장미 품종들은 올드 로즈라고 합니다. 이들 올드 로즈는 오늘날의 장미들처럼 그 아름다움으로 사랑받았지만 봄 한철, 혹은 봄, 가을 두 번만 꽃을 피웠습니다.
그런데 19세기, 유럽으로 중국의 월계화라는 원종 장미가 전해지게 됩니다. 월계화는 우리가 ‘장미’하면 떠올리는 모습에 가까운 식물인데요, 무엇보다도 봄부터 겨울이 올 때까지 꽃을 피우는 것이 큰 특징입니다. 이 월계화가 장미 품종 개량에 도입되어 여러 계절 꽃이 피는 장미들이 등장하게 되었고, 우리 주변에 흔히 심어 가꾸는 작은 나무 형태의 장미들은 대부분 이 월계화의 피를 이어받았기에 봄부터 초겨울까지 계속 꽃을 피우는 것이지요.
장미의 조상
19세기 유럽에는 월계화뿐 아니라 동양의 원종 장미 여럿이 도입되었고, 장미 재배와 품종 개량 기술이 발달해 새로운 특징을 갖는 장미들이 출현하게 됩니다. 꽃 시장에 가면 작은 꽃 여러 송이가 한 줄기에 달리는 ‘스프레이 장미’를 만날 수 있지요? 그 장미는 한 줄기에 작은 꽃 여러 송이를 내는 찔레의 형질을 이어받은 것입니다. 또, 바닥을 기는 원종 장미인 돌가시나무 혈통을 이어받아 덩굴성을 띠는 장미도 등장합니다. 서아시아 원종인 포에티다 장미는 노란색 꽃을 피우는 특징을 물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요즘 미니 장미라는 이름으로 유통되는 키 30센티미터 남짓의 작은 장미는 기원이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중국에서 발견된 난쟁이 장미의 유전자를 받은 것으로 추측합니다.
집 근처의 작은 장미원. 사계절 피는 장미를 들여다봅니다. 눈앞의 장미가 어떤 장미 원종의 혈통을 이어받았을지 궁금해집니다. 여름과 가을에도 피는 것이니까 월계화의 피가 분명히 섞여 있겠지요. 오랜 기간 동안 교배종에 교배종을 또다시 교배하고, 새로운 피를 수혈하는 식으로 개량을 거듭해왔기에 정확한 가계도를 그릴 수는 없지만요. 그래도 꽃송이 속에서 장미 조상의 얼굴을 상상해 봅니다. 계절에 쫓기지 않는, 느긋한 마음으로요.
조현진
식물과 풍경을 그리는 일러스트레이터. 조경학을 전공했다. <식물 문답>을 출간했고, <환경과 조경>에 ‘풍경 감각’을 연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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