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 꽃밭 곁에 찔레꽃과 해당화가 자란다면자생 식물은 향수와 정서, 이야기를 담은 정서 식물입니다
이동고22. 11. 03 · 읽음 152

예전에 독일 숲 교육을 취재하러 갔을 때입니다. 브란덴부르크 코트부스에서 환경 연합 나부(NABU)의 숲 체험 교육 기관을 방문했습니다. 입구에 풍성하게 꽃을 피운 나무가 있기에 책임자에게 물어보니, 한국에서 가져온 꽃나무라고 자랑하는 겁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우리나라 병꽃나무류였습니다. 우리 자생 식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정작 우리는 잘 모르고 있지요. 자생 식물을 더 심고 잘 가꾸어 우리 식물 자원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한때 자생 식물을 가꾸자는 열풍이 인 적이 있었습니다. 신토불이 운동의 영향인지, 예전에 뜰마다 가꾸던 꽃밭에 대한 향수였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시들해졌죠. 심기만 하면 꽃 잘 피우는 원예용 1년 초만 심어온 우리에게, 여러 해 자라는 숙근초이자 잡초 뽑기 등 관리를 틈틈이 해줘야 하는 자생 식물은 낯설기만 합니다. 자생 식물 특성을 잘 모르고 행했던 원예 관리의 실패였지만, 자생 식물 자체의 문제처럼 책임을 뒤집어쓴 부분이 있습니다. 자생 식물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이죠.

토종 식물이 지닌 가치를 주장하는 게 다소 시대에 맞지 않다고 여겨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새로운 자극과 신기함을 갈구하는 존재라, 같은 풍경에 쉬이 식상함을 느끼기도 하고요. 해외여행이 늘며, 이국적인 꽃 군락지가 주는 감동에 익숙해졌기 때문일까요? 어쩌면 자생 식물보다 해외에서 온 원예 식물을 더 사랑하게 된 것 같기도 합니다.

ⓒ iStock/inho Lee 

식물이 자라는 풍경은 추억과 정서와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식물원에 근무할 때 겪은 일입니다. 어르신들이 방문하면 그늘지고 편안하게 관찰할 수 있는 곳 위주로 안내합니다. 어르신 방문객 대부분은 ‘식물 설명이 뭐 그리 대단하랴’ 생각하며 건성으로 듣는 듯했습니다. 한데, 별로 화려하지 않은 식물 앞에 서자 갑자기 화색이 도는 겁니다. 바로 모시풀이었습니다. 한 할머니가 모시풀 껍질을 벗겨 실을 삼아 모시 천 짜던 옛날이야기를 하자, 주변 할머니들이 맞장구를 치며 대화가 활기를 띠었습니다. 그분들에게 모시풀은 허벅지 피살을 갉아먹던, 눈물 어린 식물이었던 것입니다. 마당비를 만들던 비짜루를 만나고, 과꽃을 만나고, 맨드라미를 만나고, 꽈리를 만나며 노인분들은 어느새 한창때로 돌아간 듯 생기가 넘쳤습니다.

얼마 전 애반딧불이 복원 행사에서 가족 단위 참가자들이 반딧불이를 개울에 풀어주는 것을 도운 적이 있습니다. 아이들보다 부모들이 더 많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어릴 적 시골에서 흔히 보던 개똥벌레에 대한 향수가 살아난 것은 아니었을까요? 행사 홍보지에는 ‘정서 곤충’이라는 글자가 찍혀 있었습니다.

Photo by Tony Phan on Unsplash

토종 식물 역시 정서 식물입니다. 향수를 일으키는 이야기를 품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많은 장미 군락 한 켠에는 찔레꽃도 있고, 해당화 군락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 식물이 우리 주변에 사라진다면 우리 정서를 기댈 곳도 사라집니다. 그 식물들이 없으면 전승할 옛이야기도, 우리 것에 대한 자부심도 사라지고, 다음 세대에 전통 가치를 전달할 기회도 잃고 맙니다.

가을 국화 축제에 아무리 국화를 많이 심는다 해도, 사람들의 공감을 끌어내지 못하면 낭비이자 겉치레에 지나지 않습니다. 원예종 국화 대신, 바람에 하늘거리는 키 큰 하얀 구절초, 청보랏빛으로 소복하게 피는 쑥부쟁이, 꽃은 작아도 향기는 짙은 산국이나 감국이 가을 국화 축제 꽃밭을 덮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봅니다. 달빛 아래 구절초 하얗게 피는 밤길을 같이 걸어보면 어떨까요? 그 향기와 운치는 또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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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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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기청산식물원에서 탐방객 식물 교육을 담당했다. 일간지에 신문 인문학 글을 연재했고 신문기자로 활동하며 독일 숲 교육, 마을 교육 공동체 등을 취재했다. 에세이 <식물에게 배우는 인문학>을 출간했으며 현재 한국작가회의 울산광역시 사무처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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