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성한 수확의 계절, 가을이 오면 누렇게 익은 벼가 일렁이는 황금 논이 떠오릅니다. 조생종 벼들은 이미 수확을 마치고 햅쌀이 되어 추석 상을 책임졌습니다. 윤기가 좌르르 흐르며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갓 지은 햅쌀밥을 싫어하실 분은 안 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밥에도 취향이 있는 법! 여러분은 어떤 밥을 좋아하세요?
저는 적당히 탄력이 있어 씹힐 때 무르지 않고, 밥알이 때로는 적당히 혀 안을 구르기도 하는 쌀밥을 좋아합니다. 한식을 먹을 때는 대체로 강하지 않은 향의 쌀을 좋아하지만, 너무 밍밍한 쌀밥 맛은 때로는 반찬의 맛을 살려주지 못한다고 생각해요. 지나치게 깨끗한 밥맛은 물맛이 느껴지는 기분이 든다고 해야 할까요. 쌀알은 조금 큰 것을 선호하는 것 같습니다.
매일 먹는 쌀밥이라 오히려 취향 같은 것 생각지 않고 지낼 때가 더 많습니다. 하지만 또 매일 먹는 밥이니 누구나, 누구보다 더, 전문가의 입맛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좋아하는 쌀알의 크기나 모양, 내가 좋아하는 밥의 향, 씹을 때의 단단함 정도, 찰기의 정도, 입안에 머무는 밥의 맛 등등을 기준으로 삼으면 ‘아, 나는 이런 밥맛을 좋아하는구나’ 하고 금방 파악이 되실 거예요.
내가 좋아하는 밥맛을 아는 것은 좋은 쌀을 고르는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요즘은 쌀을 구입하기 전에 도정일과 도정의 정도를 확인하고, 혼합미인지 단일미인지 따져보고, 내가 좋아하는 품종을 기억하고 완전립의 비율이 높은 완전미인지를 살펴보는 사람들이 많아졌는데요. 아주 좋습니다. 이런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맛있는 밥을 먹을 확률이 높아졌어요.
완전미라는 것은 낱알의 형태가 온전한 쌀의 비율이 96퍼센트 이상일 때 붙이는 말입니다. 깨졌거나 형태가 온전하지 못한 낱알은 불완전립이라고 부르는데요. 불완전립이 많을수록 밥에서 나는 군내도, 깔끔하지 못한 맛도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대부분의 불완전립은 도정 단계에서 따로 처리되지만 때로는 도정기의 성능에 따라, 품종이나 유통 방식에 따라 불완전립이 늘어나는 경우도 있답니다. 우리나라에서 쌀의 등급은 완전립의 비율에 따라 나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완전립이 96퍼센트 이상은 ‘완전미’, 90퍼센트 이상은 특, 그 아래로 상, 보통의 단계로 나뉘게 됩니다. 등급을 매긴 후에도 깨진 쌀이 늘어나고는 하는데요, 이럴 때 쉽게 완전미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쌀봉투를 흔들어 보는 거죠. 불완전립이 많을 경우에는 쌀봉투의 투명창에 묻어나는 쌀가루가 많아지니 여러분도 쌀을 직접 고르신다면 시도해 보기 좋은 방법입니다.
밥을 씹을 때의 단단함(경도)이나 찰기의 정도는 쌀을 보관하는 방법, 밥을 짓는 방법, 그리고 쌀이 가진 다당류의 일종인 아밀로스의 함량과 관계가 있는데요. 우선 아밀로스 함량부터 살펴보자면, 보통 쌀의 경도와 찰기의 정도는 반비례합니다. 아밀로스 함량이 높을수록 경도는 높아지고 우리가 씹었을 때 단단한 힘을 느낀다고 할 수 있어요. 반대로 찰기는 낮아집니다. 쉽게 말해 아밀로스 함량이 높은 멥쌀과 아밀로스 함량이 낮은 찹쌀을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하지만 사람의 입맛은 숫자로 분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단한 식감을 좋아하는 저도 적당한 찰기를 좋아하고 찰밥을 좋아하는 저희 어머니께서도 너무 무른 밥은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요. 아밀로스 함량은 분명 참고할 만한 단서이지만 다행히 쌀의 식감은 이에 따라 정확히 이분법적으로 나뉘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사람들이 좋아하는 방향으로 수많은 품종 개량이 이뤄지고 있기도 하고요. 특정 쌀이 가진 기본적인 내용을 기억하고 내가 좋아하는 맛을 대입해 그 맛에 가장 가까운 품종을 찾아 골라 먹을 수 있다면 이미 여러분은 밥에 관한 한 최고의 미식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단한 쌀도 때로는 밥을 짓는 방법에 따라 무름의 정도를 조절할 수 있습니다. 같은 쌀도 압력밥솥, 전기밥솥, 냄비, 돌솥 등 짓는 기구에 따라 다른 식감을 내는 것을 생각해 보면 크게 놀라운 이야기도 아닌데요. 전통적으로 가마솥, 무쇠솥을 많이 사용했던 한국인은 조금 무르고 찰진 스타일의 밥을 선호한답니다. 가벼운 나무 뚜껑을 사용해 밥을 짓는 일본과 비교해 보면 양국에서 출시하는 압력밥솥의 기압 기준도 다르다고 하니 내가 좋아하는 품종의 쌀을 골랐다면 이번엔 무엇으로 밥을 지을지 골라보는 재미도 있을 것입니다.
쌀을 떠올리면 취재를 갔던 많은 곳이 생각납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전북 김제입니다. 가을이면 황금빛 들판이 끝없이 펼쳐지는 지평선으로 유명한 곳이죠. 이곳에서 만난 최고의 음식은 단연 윤기가 좌르르 한 햅쌀밥인데요, 이 쌀밥을 가장 돋보이게 했던 건 갈치속젓에 삭힌 고추입니다. 만드는 방법은 정말 간단해요. 갈치속젓에 고추를 버무리고 항아리에 넣어 적당히 익힙니다. 소박한 단맛이 도는 흰쌀밥과 콤콤하니 짭조름한 삭힌 고추의 조합은 여러분이 놓치지 말아야 할 가을의 맛입니다.
장민영
음식 탐험가 장민영은 세계 각 지역 의 음식과 식자재를 탐험하고 찾아나선다. KBS <한국인의 밥상>의 방송작가였고 지금은 김태윤 세프와 함께 서촌의 지속 가능 미식 연구소, 아워플래닛을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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