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 한편에서 늘 기다리고 있던 검은별고사리그림 그리는 식물학자 신혜우 박사가 들려주는 우리나라 멸종위기 식물 이야기
hyewoo23. 01. 14 · 읽음 481

우연히 날아온 검은 별

식물도감으로 검은별고사리를 볼 때마다 이름은 참 특별한데 생긴 건 평범한 고사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땅속에 있는 줄기나 포자가 검은빛을 띠어 검은별이라 이름 붙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그 설명에 딱 들어맞지도 않았죠. 검은별고사리가 특별한 점은 멸종 위기 2급으로, 개체 수가 적다는 사실뿐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검은별고사리가 어느 날 우연히 저를 찾아왔지요.

학부 졸업 후 종종 국립수목원 프로젝트에 참여해 식물을 그리는 일을 하곤 했습니다. 실험실에서 식물 공부에 한창 집중해야 할 때는 참여하지 않았더랬죠. 박사 과정부터는 연구가 바빠 프로젝트를 하지 않았는데, 어느 늦가을에 연락을 받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봄에 프로젝트가 시작되어 식물을 선택하는데 식물이 다 시드는 11월에 무슨 일인가 의아했죠.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검은별고사리를 그리기로 한 사람이 사정이 생겨 못 하게 되었고, 그림을 맡을 적당한 사람이 없어 떠돌다가 제게 온 것이었습니다. 난감한 상황인 것 같아서 고민 끝에 그림을 맡게 되었습니다. 곧 수목원 온실에서 재배해 온 검은별고사리 화분이 집으로 배송되었습니다. 그러나 화분에서 자란 검은별고사리를 보고는 그림을 그릴 수 없었습니다. 조사한 내용과 달리 온실에서 자란 모습은 야생의 모습과 전혀 달랐고, 곧 겨울이 다가와 모두 시들어버렸기 때문이죠.

ⓒ 신혜우
ⓒ 신혜우
ⓒ 신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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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할 수 없는 시간들

허망하게 겨울이 지나고 봄에 검은별고사리 새싹이 돋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무럭무럭 자라나 포자를 맺을 때까지 기다렸지요. 그러나 베란다에서 자라난 고사리는 역시나 크기도, 모양도 야생의 모습과 너무 달랐습니다. 가슴 높이만큼 시원하게 뻗는 모양새도, 촘촘하고 많은 포자도, 위로 우아하고 꼿꼿하게 서는 고사리손도 전혀 보여주지 않았으니까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저는 그해 9월에 미국 연수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출국을 앞두고 정신이 없는 시기라 검은별고사리 관찰에 시간을 충분히 할애하기도 어려웠죠. 저는 검은별고사리를 만나러 급히 제주도로 갔습니다. 멸종 위기 2급이니 찾지 못할 거란 생각이 컸습니다. 아주 작은 집단이 어느 해안가 근처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오래 헤맬 걸 염두해 채집 차림으로 완전 무장했습니다. 다행히 생각보다 길 가까이에 자라고 있어 쉽게 찾을 수 있었죠. 집에 돌아와 열심히 검은별고사리를 그렸습니다. 하지만 예상대로 출국 전까지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모자란 것도 있었지만, 현미경으로 수없이 관찰해도 포자가 들어있는 주머니인 포자낭의 형태를 정확히 특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문헌에는 포자낭의 세포 수와 형태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았고, 논문에 실린 현미경 사진은 매우 단편적이었습니다. 정확하게 기록하지 않으면, 잘못된 식물학적 정보를 남게 되는 것이기에 조심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럴 때는 차라리 그리지 않는 편이 낫기도 합니다. 저는 포자낭을 완성하지 못하고 결국 그림과 표본을 모두 캐리어에 실어 검은별고사리와 함께 미국으로 갔습니다. 

ⓒ 신혜우
ⓒ 신혜우
ⓒ 신혜우
ⓒ 신혜우
ⓒ 신혜우
ⓒ 신혜우

오래 보아 오래 기억되는

미국에 있는 1년 동안 미완성 검은별고사리 그림은 늘 제 책상 위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문헌조사와 표본 관찰을 했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미국에 있는 연구관님께도 관찰해 달라 부탁했지요. 연수가 끝날 때까지 결론이 나지 않아 미완성인 상태 그대로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한국에서 새로운 검은별고사리 표본을 수없이 관찰하고서야 포자낭 부분을 완성할 수 있었죠. 그림이 늦어진 이유에 대해 장문의 편지를 써서 수목원에 보냈고 감사하게도 수목원에서도 이해해 주었습니다. 

이전에도 그림을 완성하지 못한 괴로움은 여러 번 있었지만, 검은별고사리는 미국에서까지 저와 함께 지내며 오랫동안 고민을 안겨주었기 때문인지 어느새 아주 특별한 존재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이런 사연이 있을수록 식물과는 더 가까워지는 것 같습니다. 검은별고사리는 자신을 평범하게 생겼다고 생각했던 저의 경솔함을 일깨워주고, 각 식물이 가진 형태를 존중하여 끈기를 가지고 관찰하여 기록하라고 가르쳐주었죠. 오래 들여다본 만큼 검은별고사리의 모습은 제게 오래 기억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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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ew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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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리는 식물학자, 식물을 연구하는 화가다. 대학에서 생물학을 공부하고 식물분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식물형태학적 분류 및 계통 진화와 같은 전통적인 연구부터 식물 DNA바코딩과 식물 게놈 연구와 같은 최신 연구들을 수행하고 있으며, 식물생태학적 분야로 연구 범위를 넓혀 나가고 있는 신진연구자이다. 영국왕립원예협회의 보태니컬 아트 국제전시회에서 2013, 2014, 2018, 2022년 참여, 모두 금메달을 수상하였으며 최고전시상 트로피와 심사위원스페셜 트로피를 수상하였다. 식물분류학과 생물 일러스트레이션 분야를 융합한 국내외 전시, 식물상담소, 강연, 어린이 교육 등 다양한 활동을 수행하고 있다. <식물학자의 노트> <이웃집 식물상담소>를 쓰고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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