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지 모양이 ‘I’자로 바뀐 수박의 사정맛있는 수박 고르는 법은 수박 꼭지 모양과 별 관계가 없답니다
전성배23. 07. 17 · 읽음 153

과일은 참 묘하다. 참외나 멜론, 수박, 토마토 같은 과채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요리에 활용되는 채소와 달리 곧장 날것으로 소비되고 평가받는 상품이니 말이다. 각종 조미료와 요리사의 숙련된 솜씨, 다른 재료와의 조화로 그 맛을 보강하고 제고할 수 없는 것이다. 수산물과 축산물도 회의 형태로 소비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과일처럼 그 모든 종류가 날것으로 소비되는 것은 아니니, 확실히 과일만큼 묘한 것도 없다. 그 묘함 때문에 과일은 소비자와 판매자, 생산자 모두를 늘 긴장하게 만든다. 소비자는 기대했던 맛을 보지 못할까 봐, 판매자는 기대했던 맛을 주지 못할까 봐, 생산자는 기대했던 맛을 내지 못할까 봐. 맛에 대한 각자의 바람이 깨질까 봐 그들은 과일을 보며 긴장한다. 이는 품종 개량과 당도 측정이 보편화된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그런데 나는 한때 과일의 이런 처지가 수박에 비하면 양반이라고 생각했다. 맛은 어쨌든 먹어야 내릴 수 있는 평가이니 그 존재 목적은 달성하는 셈이지 않은가. 수박은 그렇지 않았다. 제 맛을 보여주지도 못하고 평가받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존재 목적을 달성하지도 못한 채 헐값에 팔리거나 때론 폐기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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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여름, 더위에 흘린 땀을 식히려 먹던 수박을 떠올리면 크기와 지역, 품종을 막론하고 거기엔 반드시 ‘꼭지’가 있었다. 그것도 ‘T’자 모양의 파릇파릇하고 큼지막한 꼭지가. 싱싱한 꼭지는 맛있는 수박을 고르는 척도였기 때문이다. ‘배꼽이 작은 것’ ‘무늬가 선명한 것’ ‘손가락을 튕기며 껍질을 때렸을 때 맑은 소리가 나는 것’ 등등 맛있는 수박을 고르는 방법이 몇 가지 있지만, 모두 ‘T’자 모양이 살아 있는 싱싱한 꼭지를 전제로 둔 뒤의 이야기다. ‘T’자 모양 꼭지가 온전하게 달려 있지 않으면, 있어도 싱싱하지 않으면, 소비자의 선택에서 철저히 배제된다. 물론 일리 있는 처사다. 꼭지는 수확한 직후 가장 먼저 마르기 시작하는 부위이니만큼 꼭지가 말랐다는 건 그렇지 않은 수박보다 수확 일자가 오래되었다는 뜻이다. 그 말인즉슨 과숙되었을 확률이 높다. 문제는 꼭지의 싱싱함이 아니라 ‘T’자 모양이 온전치 않아도 구매를 꺼리는 인식에 있었다. 어찌나 심한지 ‘T’자 모양이 있고 없고에 따라 같은 밭에서 같은 날 생산된 동급 수박이라도 가격이 크게 달라졌다. 오랫동안 농민과 유통인을 괴롭힌 폐단이었다.

알다시피 수박 꼭지는 굉장히 약한 부위다. 약간의 충격에도 쉽게 꺾이거나 부러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농가에서는 수박을 유통하기 위해 팔레트에 쌓을 때 꼭지가 상하지 않도록 일정한 간격을 두고 쌓는다. 당연히 그 공간만큼 유통 효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 꼭지를 ‘T’자 모양으로 자르기 위해 들어가는 수고 또한 악영향을 끼친다. 수박 한 통당 가위질하는 횟수가 세 번 정도로 고정되어 그만큼 시간을 빼앗기기 때문이다. 이런 비효율 때문에 수박 꼭지에 관한 문제를 개선해야 한다는 얘기가 오래전부터 있었고, 그때 대안으로 나온 것이 바로 ‘I’자 꼭지였다. 그렇다. 2022년 기준 우리가 수박 철이면 흔하게 보는, 꼭지 짧은 수박을 말한다.

ⓒ 전성배

1990년대부터 이 같은 문제가 지적되었지만, 해결을 위한 움직임이 지지부진하다 드디어 2015년 농림축산식품부의 주도하에 ‘꼭지 짧은 수박 유통 활성화 시범 사업’이 개시되었고 2016년에 본격 추진되어 현재는 시장에서 ‘T’자형 꼭지 수박을 보기 힘들어졌다. 유통업자와 생산자 그리고 소비자 인식 개선을 위해 움직인 농협과 농식품부의 노력 덕분이다.

이제 수박은 단지 꼭지 모양이 상했다고 하여 평가받지 못하는 일은 드물어졌다. 여타 과일이 가진 그 묘한 성격처럼, 맛을 보여준 뒤에 평가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적어도 그 존재 목적은 달성하고 사라질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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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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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전성배입니다. [격간隔刊 전성배 산문]의 연재자이며, 지은 책으로는 <계절을 팔고 있습니다>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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