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천년고찰입니다. 보통 이 정도 오랜 역사를 가진 사찰이라면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는데, 실상사는 그런 면모 따위에 관심 없는 듯한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 절의 실체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야기를 하려면 통일신라 말엽의 시대상을 알아야 합니다.
한반도에 불교가 유입된 이후, 고구려와 백제, 신라는 각자 저마다의 특징을 살린 토착화된 불교를 발전시켜 갑니다. 익산의 미륵사지와 신라의 황룡사 구층 목탑을 떠올려보면 두 나라의 불교가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각각의 풍토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크게 변화합니다. 통일의 주체인 신라의 사람들은 신라가 불국토라는 사상을 확신했습니다. 당시 신라에 유행하던 건 화엄종입니다. “모든 현상은 하나의 이치로 돌아간다”라는 “만법귀일(萬法歸一)”이 통일 왕국의 이념이었습니다. 신라는 통일 이후 8세기 후반부터 급격하게 무너집니다. 왕실의 내분과 왕권 다툼이 심해졌고, 무엇을 해도 집권계층이 될 수 없었던 하층 귀족에게는 회의적 삶의 태도가 번져갔습니다.
인도에서 건너온 달마부터 시작한 선종이 크게 유행하던 당나라로 떠나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그때 당나라의 선종도 두 가지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누구든 단박에 쉽게 깨달을 수 있다’라는 돈오(頓悟)의 남종선이었고 다른 하나는 ‘꾸준한 수행으로 단계를 밟아 깨달음을 얻는다’라는 점수(漸修)의 북종선이었습니다. 그중 대세는 남종선의 돈오 사상이었고요. 신라에서 온 유학승은 대부분 하층 귀족이었는데, 문자를 통하지 않아도 내가 곧 부처임을 깨달을 수 있다는 돈오의 사상은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돈오는 혁명에 가까운 사상이었거든요.
유학승들이 돌아오면서 신라에서도 돈오 사상을 내세운 남종선이 크게 유행합니다. 교종 위주로 발전해 왔던 신라의 주류는 선종, 그것도 단박에 깨닫는다는 돈오를 받아들일 리가 만무했습니다. 그럼에도 선사상은 널리 퍼져갑니다. 이때 선사상이 널리 퍼지는 거점이 된 건 아홉 군데의 산중 사찰이었습니다. 이를 구산선문(九山禪門)이라고 부릅니다.
실상사는 당시 구산선문 중 한 군데입니다. 한국 선종의 시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거죠. 선종은 선 수행을 강조했으니 화려한 외관과는 애당초 거리가 멀었습니다. 실상사가 지금도 소박한 외양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그렇다고 실상사를 선의 중심지라는 묵직한 의미로만 가두어서 볼 수는 없습니다. 선 사상이란 시작부터 혁명에 가까운 것이었고, ‘나’를 깨는 혁신의 방식입니다. 독일에서 선 사상에 영향을 받아 포스트모더니즘이 탄생했다고 보는 이론도 이런 선의 성질을 연결해서 이야기한 것입니다.
선의 중심지 실상사 역시 역사의 틀에 갇힌 사찰로 남기를 거부합니다. 이미 도법 스님을 중심으로 여러 사회 활동을 하는 본거지 역할을 해왔습니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생태운동에 나섰고, 예술가를 불러들여 이 시대에 맞는 사찰의 모습을 갖추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실상사의 일주문의 양쪽 기둥에 붙인 주련은 독특합니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실상사만의 양식이고, 누구나 쉽게 읽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구를 적어두었습니다. “가득함도 빛나고 비움도 빛나라”. 다분히 현대의 시적 표현으로 적은 불법의 요체입니다. 충만함도, 무소유도 모두 마음에서 비롯된 것. 이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지만, 결국 마음의 결과임을 알면 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됩니다. 이것은 선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절 안쪽도 알게 모르게 예술작품들로 꾸며져 있습니다. 한쪽 귀퉁이를 가득 채운 대나무 숲마저도 작품입니다. 정재철 작가가 대숲을 법당으로 꾸몄습니다. 옆에 놓인 나한도라는 안내판은 의문을 자아냅니다. 커다란 나무 아래 바위 몇 개가 놓여 있고, 그 곁에 안내도가 있습니다. 안내문을 읽다 보니 아, 이제야 이해가 갑니다. 저 바위는 나한의 자리입니다. 바위는 찾아온 이에게 앉을 자리가 되어주고, 그 자리에 앉은 이는 나한이 됩니다. 쉼터이자 수행처. 나아가 이런 의미를 깨닫게 된 사람에게는 추억의 장소가 되겠지요. 작가의 의도를 짐작해 봅니다. 알 것 같습니다. 작가는 자리에 앉는 모두가 곧 부처가 될 나한(아라한)이라는 걸 은연중에 깨닫도록 한 게 아닐까요? 목탑이 있던 자리에는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사고의 희생자를 위로하기 위해 304개의 대나무로 작품을 세웠습니다. 작품은 이제 생명평화기도소가 되어 희생자를 기리는 공간이자, 우리 스스로를 위로하는 자리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실상사의 곳곳이 이런 식입니다. 현대의 예술가가 의미를 부여하고 작품을 설치해 자연과 예술이 어우러지도록 했습니다. 이 시대의 새로운 시도가 눈에 띄지만, 그래도 역시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 예부터 실상사를 지키던 것입니다. 석탑이며 건칠아미타불은 아직 건재합니다. 실상사의 전통을 좇아 수행을 하는 선방도 여전히 단정하게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이어갑니다.
실상사를 나오는 길, 예전의 해우소가 이제는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작품이 되어 있는 걸 봅니다. 해우소는 순환의 장소. 우리가 쉬이 지나쳤던 모든 것이 이 절에서는 생명력을 가지고 우리에게 존재를 알립니다. 그걸 보며 새롭게 깨닫는 것이 많습니다. 실상사는 천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아직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전합니다.

작은날개
세상을 유랑하는 이. 숲을 거닐고 바다를 헤매며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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