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식 텃밭에 허브 기르기도시 여자의 텃밭 도전기 4편, 쿠바식 텃밭
조선혜23. 05. 30 · 읽음 432

어떻게든 시작은 한다. 결과는 아무도 모른다.

농법이라고 하지만, 사실 구체적인 법칙 같은 건 없었다. 그저 내가 농사지은 방법을 그럴듯하게 써둔 것뿐이다. 도시에서 자라며 농사를 지어본 적 없는 내 또래라면 그러듯, 처음에는 농법보다는 화분 내지 화단의 개념으로 텃밭에 접근했던 것 같다. 일 년이 지난 후, 그 효과는 생각보다 훨씬 컸지만 그땐 단지 그게 예뻐 보였다. 조금이라도 예쁜 농작물을 심으려 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쿠바식 농법은 과거 미국이 쿠바 경제를 봉쇄했을 때, 식량난에 봉착한 쿠바인이 도심에서 농작물을 수확해 자급자족하는 방법을 찾다가 고안한 상자식 농법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도심에서 흙을 가둬 농사를 짓기 위한 방안이지 교외 농장용은 아닌 듯했다. 노지에 상자 텃밭이라니, 엄마는 물론이고 주위의 모든 이가 반대했지만 나는 내 뜻대로 해보려고 했다.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수확하려는 허브가 여린 풀이라는 것이었다. 허브라는 게 배추처럼 포기째 뽑아서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상추처럼 대가 굵직굵직한 것도 아니라, 노지에 심을 경우 잡초 제거가 생각보다 힘들 것 같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여린 허브를 제치고 그 사이로 끈질기게 솟아오르는 잡초를 골라낼 수 있을까? 과연 그게 구분이 될까? 엄한 허브를 매번 뽑아 대는 게 아닐까? 그런 걱정을 변명처럼 댔다.

ⓒ 조선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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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집 근처 싱크대 공장에서 조각 나무를 구했다. 애초에 텃밭용으로 나온 나무틀은 아니었기에 기껏해야 일 년 농사용으로 생각하고 사각 틀을 만들었다. 못질이 서툴렀지만 얼추 모양새를 갖추었다. 상자 안에는 흙과 퇴비를 적당히 섞어 양질의 흙을 넣어주었다. 이 시점에서 이미 흙을 한번 뒤집어엎은 셈이라 비교적 쉽게 모종을 심을 수 있었다.

고수, 애플 민트, 루콜라와 로메인을 준비했다. 이탈리아에서 온 아이들이 척박한 이곳 땅에 뿌리를 내리며 살아나려고 아등바등하지는 않을까 걱정되었다. 얇은 판자를 덧댄 쿠바식 상자 텃밭에서, 아파트 베란다 화단에서나 키울 법한 허브를 키워낼 수 있을까?

그런 우려와 달리, 막상 키워보니 식물의 살아남으려는 의지가 모든 걸 말해주는 듯했다. 얼마나 더 땅에서 배워야 할까? 농사를 할수록 그동안 내가 살아온 세계가 턱없이 작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모르는 게 너무나도 많고, 그조차도 제대로 모르고 살아왔다.

쿠바식 상자 텃밭 위에 흙이 마르지 않도록 덮어 둔 마른 볏짚을 걷어내자 푸르른 새싹이 드러났다. 씨를 심고 딱 일주일. 씨에서 튼 움이 흙을 뚫고 볏짚을 헤치며 자라난 시간이다. 무리 지어 도와가며 크기라도 한 듯 여기저기 모여 자란 모양새가 자못 기특했다.

ⓒ 조선혜

어떤 냄새는 기억나지 않는 추억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나는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시골에서 자랐다. 그때 기억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건, 어쩌다 한 번씩 친구네 아버지 경운기 뒤에 탈 때 나던 냄새다. 온갖 퇴비를 싣고 다니던 경운기에선 늘 똥 냄새도 흙냄새도 아닌 특이한 냄새가 났다. 친구들은 소 똥내라고 불렀으나 난 그 단어를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뭐라 말할 수 없지만 분명히 달랐다.

유기농 텃밭에 농사를 지으면서 농약을 일체 사용하지 못했다. 비닐 멀칭도 금하는데 퇴비 사용이 가능할 리 없었다. 대신, 최소한의 영양 공급을 위해 지정된 퇴비는 사용할 수 있었다. 퇴비를 봉해둔 실밥을 처음 뜯는 순간, 어릴 적 경운기 뒤에서 맡았던 그 냄새가 떠올랐다. 썩은 나뭇가지 냄새 같기도, 부패한 흙냄새 같기도 한 그 냄새.

엄마는 퇴비를 뜯자마자 숨을 멈추고 얼굴을 구겼지만, 내게 그 냄새는 왠지 그리운 무언가를 불러오는 것 같았다.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언제나 그리운 어린 시절 나와 친구들, 그곳의 삶을.

익숙한 냄새라는 것.

익숙한 풍경이라는 것.

익숙한 것들이 나를 어디론가 데려간다.

익숙한 것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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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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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처럼, 평범한, 이 시대의 한 사람. 느루라는 이름으로 브런치를 운영하며, 에세이집 <비로소>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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