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제 취향이 아니에요.”

*본 글은 영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일요일의 병> (라몬 살라자르 감독, 2018)
키아라는 여덟 살 때 자신을 버리고 떠난 엄마 아나벨을 찾는다. 그리고 열흘만 같이 지내자고 한다. 친권 포기 각서에 사인을 한 뒤 받아낸 엄마와의 시간, 열흘.
열흘 동안 사랑하라고 한다면 무얼 할까. 아니, 열흘 동안 살라고 한다면 우린 무얼 할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또 말할까. 그걸로 부족해 사랑하는 그 사람과 무엇이라도 하고 싶을까. 떠나는 입장에서 무엇이든 주고 싶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랑받아본 이의 오만일 수 있다는 걸 키아라를 보며 알았다.
키아라는 키우던 개 나타샤와 일부러 진흙탕에서 구른 뒤 우물에 빠진 개를 구해 왔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러고는 아나벨에게 구출해 온 개 씻기는 것을 도와달라고 한다. 사랑받는 모습을 연출한 키아라의 의도대로 아나벨은 키아라의 진흙투성이 이마와 머리를 씻겨준다 – 잠시.
시내에 나가 회전목마를 타는 키아라. 또다시 키아라의 의도대로 아나벨은 회전목마 타는 딸을 바라보는 엄마 역할을 맡는다. 아무도 없는 회전목마에 올라탄 성인 키아라의 모습에 여덟 살 순수한 여자아이의 미소가 겹쳐진다 – 잠시. 이내 빈 회전목마가 빙글빙글 돌아가자, 어린아이를 찾는 불안한 엄마의 눈빛과 몸짓이 아나벨에게 나타난다. 사라졌다 다시 나타난 키아라에게 아나벨이 ‘엄마처럼’ 말한다. “움직이는데 내린 거야? 위험해.” 그런 걱정이 간지럽다는 듯 키아라가 대꾸한다. “늘 더럽게 재미없는 기구라고 생각했어요.” 반항기 어린 십 대처럼 키아라는 술을 마시고 낯선 남자와 춤을 추고 품에 안긴다. 키아라는 이제 엄마의 구출을 받는 딸이 된다.
사랑의 순간은 너무나 짧게 끝난다. 사랑받아본 적 없는 키아라가 그것을 견디지 못해서기도 하지만, 사실 사랑받고 싶었다는 절절한 고백을 할까 봐 스스로가 불안한 역설적인 태도 때문이기도 하다. 바다처럼 끝없는, 엄마를 향한 아이의 순수한 사랑과 그리움.
“벌써 일요일이라고요?” 하루를 꼬박 잠으로 날려버린 키아라에게는 엄마와 보낼 시간이 하루 줄었고, 헤어져야 할 시간은 빠르게 다가온다.

아나벨은 마당에 캄파눌라 씨앗을 심는다. “얼마 전에 사둔 씨를 심고 있어. 캄파눌라야. 꽃이지.” 척박한 토양에서도 끄떡없는 강한 꽃이라는 아나벨의 말에 키아라가 대꾸한다. “꽃은 제 취향이 아니에요.”
죽어가는 딸에게 아나벨은 이듬해에 피는 꽃을 약속하고 싶었을까? 떨어져 지낸 세월 동안 엄마보다 더 어른스러워진 딸은 죽음의 문 앞에서 피고 또 피는 꽃을 희망하는 낭만주의자가 아니다. 피고 또 핀다는 것은 지고 또 졌다는 말과 다름없다. 강하다는 것은 계속해서 다시 태어나고자 하는 욕망보다는, 사라지기를, 가라앉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아나벨은 다시 만나 사랑하게 된 딸에게 피고 또 피어나자고 말하지만, 키아라는 피어난 순간 속에 영원히 깃들어 있다고 말한다. 꽃이 취향이 아니라는 말은 그런 뜻으로 들린다.

보이지 않는 영원을 꿈꾸는 키아라는 나무를 사랑한다. 키아라가 자주 오르는 산에 있는 두 그루 나무. 키아라와 아나벨이 태어나기 전부터 살아왔으며 몇 백 년, 몇 천 년이 지나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나무들. 탯줄처럼 뿌리가 이어져 있어, 두 그루지만 결국 하나인 그 나무의 삶이 키아라에게는 영원이다. 아나벨이 키아라를 보자마자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던 건 그들이 하나의 대지에 연결되어 있는 나무 같은 존재기 때문이다.
키아라는 아나벨에게 부탁한다. 두 그루 나무처럼 바람결에 선 채로 엄마 품에서 죽고 싶다고. 영원히 그 품에 살게 해달라고.
발가벗은 채 키아라는 물속으로 잠기고, 아나벨은 다시 새롭게 떠오른다. 이제는 키아라의 그림자가 없는 집, 키아라의 방에 불이 켜져 있다. 그 불빛은 아나벨의 가슴으로 옮겨가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된다.
태초에 두 그루 나무가 있었다. 인간을 지키며 그 자리에 영원히 서 있을 듯한 두 그루 나무는 죽어도 산 것처럼 불멸로 남을 것이다. 숲이 자궁인 듯 흙바닥에 누워 풀린 시선으로 말하던 키아라의 음성이 내내 잊히지 않는다. “피곤해요.” 사랑하느라 지친 영혼은 이제 그만 쉬고자 나무 곁에 눕는다.
정원
자연에서 들려오는 낱말들을 모으며 느리게 삽니다. 지은 책으로 <실용낭만 취미살이> <작고 소중한 나의 텃밭> <떡볶이 공부책> <짜장면 공부책>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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