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한 번, 남해의 관문으로
남해각은 1970년대 우리나라 관광 산업의 태동을 상징하던 건축물이다. 1973년 6월 하동과 남해를 잇는 남해대교가 완공되면서 남해는 섬에서 육지로 거듭났다. 길이 660미터에 이르는 ‘아시아에서 가장 긴 현수교’의 개통식에는 전국 각지에서 모인 인파가 10만 명에 이르렀을 정도. 남해군의 인구가 13만 명이던 때다. 그후 2년 뒤 대교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남해각이 들어섰다.
지금은 사라진 해태그룹이 관광 산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며 북쪽에 지은 것이 임진각, 남쪽에 지은 것이 바로 남해각이다. 남해대교가 여행 명소로 떠오르면서 숙박과 휴게 시설을 갖춘 남해각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관광 인파로 북적거렸다. 이후 관광 트렌드가 변화하면서 남해각의 호시절은 점차 옛이야기가 되었고, 남해각 건물은 2018년 노량대교가 개통하면서 그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다행히 남해각의 시간은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복합문화 시설로 재개관한 남해각은 남해 여행의 관문으로 두 번째 전성기를 꿈꾼다. 남해대교의 주탑을 본떠 만든 기둥을 비롯해 건물 본래의 특징은 그대로 살렸고, 카페와 레스토랑, 나이트클럽 등이 들어섰던 지상 1층과 지하 1층은 전시 공간으로 변신했다. 숙박 시설이던 2층은 남해를 방문한 여행자를 위한 플랫폼으로, 3층은 야외 전망대로 탈바꿈했다. 특히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남해대교와 남해각에 관한 기록을 아카이빙해 선보인 상설전시는 남해 주민에게 이 두 장소가 지닌 정서적 상징성을 엿볼 수 있어 흥미롭다.
경남 남해군 설천면 남해대로 4216
섬의 자부심을 되살리기
삼동면 시문교차로에 이르면 마을 초입에 우직하게 자리한 네모 반듯한 건물이 눈에 띈다. 남해 돌창고다. 이는 남해를 상징하는 건축물로, 마을의 곡식과 비료 등을 저장할 목적으로 지은 것. 한때는 현지인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지만, 1970년대 남해대교가 개통하면서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돌창고는 곳곳에서 그냥 방치됐다.
그중 시문리에 남아 있던 돌창고가 한 문화 기획자의 노력으로 2016년에 전시장으로 변신했다. 이렇게 시작된 돌창고 프로젝트는 신진 작가의 전시, 레지던스 프로그램 등의 다양한 시도를 선보이며 남해 고유의 전통과 문화를 아카이빙하고 재생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인다. 남해의 각 마을의 보호수 31그루를 찾아 기록하고, 전시와 출판, 지도 제작 등을 통해 그 가치를 알리는 장기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있다.
전시를 관람한 뒤엔 돌창고와 마주한 애매하우스에 들르는 것이 필수 코스다. 1960년대 이래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던 유휴 공간을 개조해 카페와 레지던시로 재탄생했다. 1층 카페에선 남해의 이파리로 만든 페스토와 남해 해모아 목장의 숙성 치즈를 올린 이파리 빵 등 로컬 식자재를 활용한 메뉴를 제공한다.
경남 남해군 삼동면 봉화로 538-1
다도해의 아침
금산 남쪽 절벽에 기댄 보리암은 신라시대 원효대사 세운 사찰로, 강화도 보문사, 양양 낙산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해상관음성지로 꼽힌다.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서 기도하고 조선 건국의 꿈을 이뤘다고 전해지며 예부터 효험 있는 기도처로 이름을 알렸다. 보광산의 보광사가 ‘금산의 보리암’ 으로 바뀐 것도 이때부터다.
남해 여행자에게 보리암은 필수로 찾아가는 전망 포인트다. 매표소에서 도보로 15분 정도만 걸어가면 다도해의 절경이 기다리기 때문이다. 초록 사이로 불쑥불쑥 튀어나온 암벽 사이에 들어앉은 보리암에 가까워지면, 초승달 모양으로 육지를 파고든 상주은모래비치와 주변을 에워싼 지붕들, 주변 산세와 다도해가 어우러진 풍광이 눈앞에 펼쳐진다. 금산의 산자락과 남해의 섬들이 어디가 산이고, 어디가 섬인지 모르게 첩첩이 겹쳐져 이성복 시인의 ‘남해 금산’ 속 한 구절처럼 풍경은 ‘푸른 바닷물 속에 잠긴다’.
기왕 보리암까지 왔다면, 여기서 200미터 정도 더 올라가는 금산산장도 한 번쯤 가볼 만하다. 1950년대에 지은 등산객 쉼터가 최근 ‘컵라면 맛집’으로 불리며 인기를 끌고 있다. 사방이 탁 트인 벤치에 앉아 발 아래 풍광을 마주하면, 여기가 왜 ‘SNS 인증샷 명소’로 불리는지 이유를 알게 된다.
경남 남해군 상주면 보리암로 665
남해의 빛
‘해변’이 아니라 ‘비치’. 상주은모래비치는 이곳의 정식 명칭이다. 키 큰 소나무 숲이 병풍처럼 둘러싼 백사장과 그 모래가 둥글게 감싼 해변은 파도가 잔잔하고 경치가 아름다워 오랜 세월 남해 사람들과 남해를 찾은 여행자들에게 핫플레이스였다. 상주해수욕장이라는 옛 이름이 사라진 지 오래이고, 최근에는 캠핑 사이트를 정비해 오토 캠핑장으로 인기여도, 세련된 느낌보다는 빛 바랜 사진 속 풍경 같은 순수함이 남아 있다. 이름만 들어도 여전히 어딘가 젊은 시절의 설익은 낭만이 느껴진다.
백사장의 모래가 은빛으로 빛난 다고 해서 붙은 이름인데, 햇살에 반짝이는 바다의 물결이 오히려 은빛에 가깝다. 수심이 깊지 않아 물놀이에도 제격이다. 바다에 몸을 담그기 어려운 계절에는 2킬로미터 길이의 백사장을 따라 거닐거나 소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 물멍을 해도 좋다. 해변을 등지고 돌아서면 아침에 오른 금산이 마주 보인다. 몇 시간을 사이에 두고 보리암과 상주은모래비치, 각각의 풍경 속에 서 있는 기묘한 경험을 하게 되는 셈. 남해의 풍광을 좀 더 입체적으로 경험하고 싶다면 바다와 산 모두 방문하길 추천한다.
경남 남해군 상주면 상주로 17-4
피치바이피치
피치바이피치는 여행을 통해 타인과 세상을 이해하고 지속 가능한 삶에 기여합니다. ‘좋은(good)’ 가치를 담고 있는 여행이 피치바이피치가 추구하는 ‘멋진(cool)’ 여행입니다. 피치바이피치의 생각을 의식 있는 여행자들과 나누고자 연 4회 트래블 코멘터리 매거진 <피치 바이 매거진>을, 월 2회 뉴스레터 ‘피치 바이 레터’를 발행하며, 지속 가능한 여행 상품을 발굴, 홍보, 판매하는 온라인 큐레이션 플랫폼 ‘피치 바이 트래블’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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