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미자로 빚은 와인
문경새재로 통하는 주흘산을 뒤에 두고 자리 잡은 오미나라. 양조장 건물 입구부터 오크통이 보이고 마당에 불쑥 서 있는 거대한 구리 증류기는 마치 오래된 설치 미술 작품 같다. 외관은 수수하지만, 이곳에서 생산하는 오미자 스파클링 와인과 브랜디는 세련된 맛으로 호평을 얻고 있다. 조선시대부터 유명했던 오미자의 특산지에서 전 세계 유일의 오미자 와인을 상품화했다는 것도 무척 흥미로운 요소다. 포도 발효는 3~4주가 걸리는 데에 반해, 오미자는 발효에만 1년 6개월이 걸리고 숙성해서 와인으로 만들기까지 3년이 걸린다.
오미나라에서는 소위 말하는 업계의 고수들이 술을 만들고 있다. 이곳의 이종기 대표는 우리나라 최초의 위스키 블렌더 출신으로, 글로벌 주류 브랜드에서 오랜 경력을 쌓았다. 다섯 가지 맛을 낸다는 오미자의 당도는 약 12 브릭스. 사이다 정도의 당도지만 시고 쓰고 짜고 매운 맛이 더해져 실제로 단맛을 느끼기 어렵다. 이를 발효해 적당한 단미를 풍기는 와인을 만드는 게 과제. 오미나라는 문경 동로 지역에서 생산한 유기농 오미자를 사용하며, 밸런스를 잘 살린 스파클링 와인은 물론 스틸 와인과 브랜디도 선보인다. 시음장에서는 오미나라가 양조하는 모든 제품을 맛볼 수 있다. 오미자 와인의 높은 가격대와 소규모 유통망을 생각하면, 놓치기 아쉬운 기회다. 오미로제 연과 결은 핑크 빛깔에 선명한 기포, 신맛과 단맛의 밸런스가 돋보인다. 오크통 대신 백자 항아리에 숙성한 고운달 브랜디는 높은 도수에도 불구하고 부드러운 목 넘김과 오래 지속되는 향이 매력적. 오랜 숙성의 시간으로 맺은 결실은 다시 한번 잔을 채우게 한다.
2. 전통주의 화려한 변주
동로면을 가로지르는 금천 변으로 한갓진 동네의 분위기가 나른하게 퍼진다. ‘주담정(酒談停, 술과 이야기가 있는 곳)’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문경주조의 솟을대문을 넘자 술 항아리가 눈에 들어온다. 숙성을 고려해 유약을 바르지 않았다는 항아리마다 각기 다른 발효 기간과 주종이 써 있다. 2007년 설립한 문경주조는 현대적으로 변주한 전통주로 입지를 다지는 양조장이다. 전통 생막걸리부터 오미자 막걸리, 탁주, 탄산 약주, 쌀맥주 등 다채로운 술이 이곳에서 탄생했다.
문경주조 시음실의 테이블에 식사와 시음이 풍성하게 준비된다. 시작은 가벼운 오미자 생막걸리와 탄산 약주 오희부터. 오미자 생막걸리는 우리나라에서 과실을 넣어 주조한 첫 번째 막걸리로, 새 새콤한 맛이 은은하게 감돈다. 1차로 만든 탁주에 오미자를 첨가한 후 발효한 오희는 스파클링 와인 같은 전통주다. 천연 탄산이 퍼지는 깔끔한 맛이 식전주로 잘 어울린다. 문경주조를 대표하는 두 술로 시음을 이어간다. 유기농 햇찹쌀과 전통 누룩으로 100일간 발효한 삼양주(밑술에 두 번의 덧술을 넣어 빚는 전통주) 인 문희와 문희에서 맑은 술만 떠내어 2년간 더 숙성했다는 맑은 문희주다. 문특히 맑은 문희주는 은은한 단맛과 깔끔한 뒷맛이 빼어나다. 막걸리에 직접 재배한 홉을 첨가해 만든 쌀 맥주 폭스앤홉스도 빼놓을 수 없다. 문경에서 이곳 양조장까지 오려면 여우 고개를 넘어와야 해서 붙인 이름이라고. IPA와 비슷한 묵직한 맛과 홉 향이 혀와 코를 자극해 식사의 마무리로 제법 어울린다.
3. 국내 유일의 밀 소주
안동시 도산면의 낙동강 상류를 트렉터로 건넌다. 마치 육지 속의 섬처럼, 굽이치는 강물을 두른 땅자락의 맹개마을에 들어가는 방법이다. 수량이 불어나는 여름철에 이도 여의치 않아 배를 타고 건너 들어가야 한다. 맹개마을은 퇴계 이황의 시구에도 언급될 만큼 아름답고 낭만적인 풍경을 자랑하며, 진맥소주의 원료로 쓰이는 밀이 이곳에서 자란다.
맹개마을은 농사를 짓고 손님을 맞이하는 곳이다. 원래부터 밀 농사만 하던 지역. 2007년 여기까지 내려와 맹개마을을 일군 박성호 이사는 국내 유일의 밀 소주를 세상에 선보인 주인공이다. 술은 도산면 내의 맹개술도가 양조장에서 만들고 있다. 맹개마을에서는 재료가 되는 밀을 재배하고 술을 숙성시킨다. 안동시 전체에서 안동 소주를 만드는 양조장은 9곳인데, 맹개술도가만 유일하게 밀로 소주를 양조한다. 조선시대 음식 조리서 <수운잡방>에 소주를 밀로 빚었다는 내용이 나오니 밀 소주의 역사는 의외로 길다.
맹개술도가의 진맥소주는 22도부터 57도까지 도수와 숙성 방식에 몇 가지로 나뉜다. 일반 진맥소주는 향긋하고 알싸한 밀향과 소주답지 않은 깔끔한 맛이 좋다. 오크통에 숙성한 캐스크 스트렝스 57도 제품은 ‘더 락’\이라는 별도의 라벨을 붙였는데, 맹개마을 앞 강줄기 한가운데, 퇴계 이황이 ‘경암’이라고 이름 붙인 바위에서 이름을 따왔다. 정식으로 출시되기도 전에 올해 생산분이 전부 판매됐을 정도로 인기다. 한 모금의 테이스팅으로도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싱글 몰트 위스키에 버금가는 곡물향과 오크향, 균형 잡힌 보디감, 부드러운 뒷맛이 일품이다. 멀리서 찾아온 이가 하루를 충분히 쉴 수 있는, 이만큼의 술과 장소를 찾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4. 명문 종갓집의 가양주
물 위에 술을 띄우고 시를 지으며 마시는 유상곡수(流觴曲水)는 조선 시대의 풍류 문화였다. 선비의 고장이라고 불리는 안동에는 농암 이현보(李賢輔, 1467~1555)와 퇴계 이황이 낙동강 한 줄기에 술잔을 띄우고 유상곡수를 즐겼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청량산 자락의 농암종택은 풍류 문화의 이야기와 실체를 경험해볼 수 있는 곳이다.
종택의 멋들어진 한옥을 보며 마당을 거닐다 평상에 앉아 650년을 이어온 안동 명문가의 술, 일엽편주를 시음해본다. 대대로 내려온 방식에 따라 누룩을 직접 밟고 100일간 발효해 수작업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탁주, 청주, 소주로 나뉘며 만들며 시기에 따라 꽃술도 주조한다. 그중 가장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술은 청주다. 쌀의 달콤함과 누룩에서 나온 과일향이 조화를 이루어 입안에 다양한 맛을 감돌게 한다. 탁주보다 긴 상미기간(6개월)으로 오래 두며 마시기에도 좋다. 퇴계 이황의 글씨를 활용한 라벨과 전통미를 살린 고급스러운 패키징은 또 하나의 차별 요소. 아마도 가장 동시대적인 종가집 가양주가 아닐까 싶다.
피치바이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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