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의 시작을 이야기할 때도 채소를 빼놓을 수 없다. 건국 신화에 쑥과 마늘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동남아 지역의 건국 신화에는 벼와 쌀이, 남미의 창조 신화에는 옥수수가 농경의 신으로 등장한다. 우리가 익히 아는 단군신화의 가장 오래된 기록은 13세기말 일연(一然)이 쓴 <삼국유사>에 나온다. 천제(天帝) 환인의 아들인 환웅이 태백산 신단수 아래에 신시(神市)를 열고 여러 신과 세상을 다스렸는데, 이때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고자 찾아왔다. 환웅은 100일간 햇빛을 보지 않고 쑥과 마늘만 먹으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이에 호랑이는 참지 못하고, 참을성 많은 곰만이 삼칠일을 견뎌 사람이 되었다. 여인이 된 곰은 환웅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단군이다. 단군은 평양에 도읍하여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는데, 바로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 고조선이다.

우리나라의 건국 신화를 통해 이 시대에 이미 쑥과 마늘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마늘은 시기적으로 보아 달래나 명이나물일 확률이 높다. 명이나물은 울릉도에서 주로 재배되며, 장아찌로 담가 먹고 산마늘이라고도 한다. 둘 다 마늘 냄새가 나는 채소들이다. 현재의 마늘은 이집트가 원산지로, 한나라(기원전 06~220) 때 중국에서 들어와 한자로 ‘대산(大蒜)’으로 쓰였다. 그 이전에 산(蒜)으로 불리던 달래나 산마늘(명이나물)은 ‘소산(小蒜)’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러니 단군신화 속 마늘은 마늘이 아닌 달래나 명이나물로 보아야 한다. 아무리 참을성 많은 곰이라도 생마늘을 100일간이나 먹기는 어렵지 않았을까?
아무튼 단군신화에서의 마늘은 신령스러운 약, 즉 영약을 상징한다. 예로부터 마늘은 쑥과 함께 나쁜 것을 물리치는 벽사(辟邪)의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마늘(마늘, 달래, 산마늘 가리지 않고)의 강한 냄새에 나쁜 귀신이나 액을 쫓는 힘이 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캄캄한 밤에 길을 떠나며 마늘을 먹었는데, 밤길의 마늘 트림이 나쁜 귀신을 물리치고 호랑이도 도망가게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한편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쑥도 상징적인 채소다. 우리 조상들은 쑥으로 단옷날 사람의 형상이나 호랑이의 형상을 만들어 걸어놓고 나쁜 기운을 쫓는 데 썼고, 이사를 하면 그 집의 나쁜 기운을 없애기 위해 쑥을 태우기도 했다. 또 쑥은 동물적인 존재에 영성(靈性)을 부여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사용한 쑥을, 서양에서는 다른 용도나 의미로 사용한다. 실제로 쑥은 세계 각지에서 자라고 종류도 다양하다. 특히 유럽과 러시아에서 자라는 ‘웜우드(wormwood)’라는 쑥은 독성이 강해 먹을 수 없고 간질이나 환각 작용을 일으킨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도 쑥을 넣어 술을 빚기도 하지만 프랑스나 독일에서 자생하는 쑥은 술의 원료로 사용되는데, 쑥을 넣어 만드는 술로 압생트(absinthe)가 있다. 그런데 러시아에서 쑥은 망각의 채소로 알려져 있다. 우리 건국 신화의 주인공인 쑥이 다른 나라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로 알려진 것이 흥미롭다.
정혜경
호서대학교 식품영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나물을 많이 먹고 채식에 기반한 한식을 최고의 건강식으로 생각한다. 자칭 한식전도사. 저서로는 <채소의 인문학>, <밥의 인문학>, <조선 왕실의 밥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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