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918~1392)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창의적이고 국제적인 나라로 꼽힌다. 당시 고려인들은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 주로 어떤 채소를 먹었을까? 문화적으로 풍요로웠던 만큼 채소도 다채롭게 즐겼다. 무엇보다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삼고 있었다. 살생을 금하고 어육을 피하고 소식(素食, 채식 위주의 소박한 식사)을 중시했다. 한국음식의 채식 전통은 이때부터 기틀을 다지게 된다. 채식 위주의 식사로 식생활의 범위가 좁아진 듯 보여도, 외국과의 교류가 활발했고,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식기로 고려청자기를 사용할 만큼 식문화가 발달했다.

그런 만큼 고려시대에는 좀 더 다양한 채소류가 문헌에 등장한다. 고려 중기의 문인 이규보가 쓴 〈가포육영(家圃六詠)〉은 그가 채마밭에 심은 여섯 가지 채소에 대하여 읊은 시다. 여섯 가지 채소 ‘육영(六詠)’은 우리에게 친숙한 오이, 가지, 무, 파, 아욱, 박이다. 시의 내용으로 미루어볼 때, 가지는 날로도 먹고 익혀서도 먹었으며, 박은 속은 파먹고 껍데기는 바가지를 만들었다. 파는 양념과 술안주로 쓰였다. 무는 여름에는 장아찌로, 겨울에는 소금에 절여서 저장해두고 먹는다고 했으니 지금의 동치미가 그것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익(李瀷, 1681~1763)이 쓴 <성호사설(星湖僿說)> 5권에도 고려의 생채는 맛이 좋고 향기가 멀리 퍼진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고려인은 무생채나 오이생채 등을 먹었을 것이다. 원나라 사람들이 이를 좋아해 천금을 주고 사는 채소라는 의미로 천금채(千金菜)라 불렀다고 한다.
고려인은 산과 들에 자생하는 야생초도 캐 먹었다. 중국 송나라의 서긍(徐兢)이 쓴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는 고려의 더덕이 관에서 날마다 올리는 나물로, 형체가 크고 살이 부드럽고 맛이 있으며 약용으로 쓰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고려 후기에 김극기(金克己)는 사계절 풍경을 노래한 한시 〈전가사시(田家四時)〉의 봄 편에서 “어린애는 나물과 고사리 찾아(稚子尋筍蕨)/바구니 들고 양지쪽 산골로 향하네(提筐向暄谷)”(동문선, 4권)라고 했는데, 당시 산나물, 고사리 등을 먹었음을 알 수 있다. 얼마 전까지도 볼 수 있었던 농촌의 봄 풍경이다.

또한 고려 후기의 문신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에는 송이버섯을 가리키는 송지(松芝)라는 단어가 나온다. 즉, 고려 때에 버섯을 먹었다는 말이다. 이후 이색(1328~1396)이 쓴 〈주필사민기후혜송이(走筆謝閔祇侯惠送茸)〉라는 시에 ‘송이’가 나온다. 송이는 본래 적송(赤松)의 뿌리에서 나오는데, 한반도에는 오래전부터 적송이 있었으므로 고려 이전부터 송이를 먹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버섯에 관한 또 다른 기록으로, 오늘날 약으로 쓰이는 ‘영지(靈芝)’가 <고려사>에 나온다. 충숙왕 때 미륵사의 스님이 기이한 풀을 ‘영지’라고 하여 왕에게 바치므로, 왕이 귀중히 여겨 깊이 간직했다는 것이다. 이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이때까지만 해도 영지의 진가가 알려지지 않은 채 기이한 풀 정도로 여겨진 듯하다.
삼국시대부터 이미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치고 있던 인삼은 고려시대에도 왕과 귀족들의 사랑을 받았다. 고려시대의 인삼에 대해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 인공 재배설이 논의되고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설사 고려 때 인삼이 인공 재배되었다 해도 그 시기는 후기였을 것이다. <고려사>의 ‘충렬왕 1년조’에 인삼 채굴을 한정했다는 기록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인삼도 원래 야생 채소였으나 그 약효가 인정되어 약재로 개발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서민들은 여전히 도토리를 먹었다. <고려사>에는, 충선왕 때 흉년이 들자 왕이 백성을 생각해 반찬의 수를 줄이고 도토리를 맛보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때 도토리는 구황식의 역할을 했다. 고려 후기에 편찬된 것으로 알려진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에서도 연근, 도라지, 토란, 아욱, 상추, 무, 배추, 우엉 같은 채소를 찾아볼 수 있다.
한편 국가 제사인 원구제 친사 때의 제사상에는 미나리, 죽순, 무 등이 올랐는데, 고려 말 공양왕 2년에 정해진 제사상에도 채소가 포함되어 있다. 이를 통해 당시 채소가 식품, 선물, 약재, 제수 등 다양한 용도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정혜경
호서대학교 식품영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나물을 많이 먹고 채식에 기반한 한식을 최고의 건강식으로 생각한다. 자칭 한식전도사. 저서로는 <채소의 인문학>, <밥의 인문학>, <조선 왕실의 밥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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