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철 채소 요리가 발달한 조선시대 조선시대의 채소 팔도지리지
정혜경23. 07. 08 · 읽음 535

한식 문화가 완성된 시기라고 할 수 있는 조선시대에는 주로 어떤 채소를 먹었을까? 조선시대 양반의 일상식은 쌀밥에 부식이 곁들여지는 형태였다. 부식으로는 국, 찌개, 김치와 나물, 구이 등을 먹었고, 자반이나 장아찌, 젓갈 등도 있었다. 다양한 부식을 마련하기 위해 반가의 살림은 늘 분주했다. 채소를 재배해 먹었지만 밑반찬용으로 장아찌를 담그고 채소가 나지 않는 때를 대비해 산과 들에서 뜯어온 나물을 말렸다. 가을에는 겨울을 대비해 김장을 하고 국과 나물찬의 기초 조미료인 장을 담갔으며 장을 담그기 위해 메주를 쑤어 띄웠다.

고려시대부터 활용한 다양한 채소는 조선시대에도 중요한 부식의 역할을 담당했다. 조정은 각 지역의 산물을 상세히 기록했다. 세종 때는 각 지역의 특산물을 기록한 <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1432)가, 성종 때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1481)이 편찬되었다. 이 책들은 조선 8도의 지리와 인문을 망라한 것으로, 고려 말기부터 조선 초기의 식품사전이라고 할 수 있다. 

© Andrew Ridley on Unsplash 

다양한 채소류 중에서 특히 버섯류가 눈에 띄는데, 고려 때 개발된 버섯의 식용법이 조선시대에 와서 완전히 부식으로 자리를 굳히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송이버섯, 표고버섯, 석이버섯 등을 많이 먹었다. 그러나 버섯이 자주 상에 오르면서 간혹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독버섯이 문제가 되었던 듯,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덕무(李德懋)(1741~1793)가 쓴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는 이를 방지하기 위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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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들에게 나물은 생명줄과도 같은 음식이지만 조선시대 왕도 채소를 즐겼는지 궁금하다. 실제 조선시대 궁중음식은 주로 진연이나 진찬을 기록한의궤 통해 궁중 잔치 음식에서 있다. 그런데 잔치 음식에서 채소는 중요한 식자재가 아니었다. 나물 정도가 상에 올라갔다. 아무래도 채소보다 귀한 동물성 식품이 주로 올라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왕실의 일상식은 1795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갑을 기념하여 8일간(음력 2 9~16) 화성에 행차한 의식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의 수라상 차림을 통하여 추측해 볼 있다.

이 화성 행차 때 차려진 일상 수라상에 올라간 음식의 채소는 박고지(朴古之), 미나리(水芹), 도라지(桔梗), 무순(菁芛), 죽순(竹筍), 움파(茐笋), 오이(菁瓜), 물쑥(水艾), 거여목(苴蓿), 승검초(辛甘草), 녹두나물(綠豆長音), 동아(冬瓜), 겨자순(芥子長音), 생강순(生薑筍), 표고(冬苽) 총 15종이다. 대부분 익숙한 채소로, 특별한 채소나 나물이 등장하기보다 움파나 무순, 겨자순이나 생강순 등 싹 나물이 많은 것이 눈에 띈다. 원행 당시의 계절이 봄이어서인 듯하다. 그 외 미나리, 도라지, 오이 등 지금과 비슷한 채소를 먹었다. 그리고 반수라상(아침, 저녁으로 올리는 밥이 놓인 수라)의 채소류 음식은 김치류로서 침채와 담침채로 구분한다. 침채(沈菜)는 소금물에 담근(절인) 채소를 가리킨다. 김치가 침채에서 왔다고 보기도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그런데 조선시대 김치는 고추가 들어가지 않은 것이 일반적이었고, 물이 자박한 형태가 많았다. 이를 묽은 ‘담(淡)’자를 써서 담침채라 불렀다.

조선시대는 채소의 기준은 계절성과 지역별로 나는 채소를 중시하였다. 서민에게는 생명줄로, 왕실에서는 계절별로 다양한 나물 음식을 즐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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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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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서대학교 식품영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나물을 많이 먹고 채식에 기반한 한식을 최고의 건강식으로 생각한다. 자칭 한식전도사. 저서로는 <채소의 인문학>, <밥의 인문학>, <조선 왕실의 밥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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