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의 시간은 이른 새벽, 마음을 가지런하게 정돈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늘어지는 주말, 한 곡의 음악을 고르고 한 권의 책을 꺼내고 싶은 분위기를 만들어준다. 평소와는 조금 다르게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 혼자서 차 한 잔을 내려 마신다.

하지만 일상의 흔적으로 가득한 공간에서 남다른 시간에 빠져드는 것은 쉽지 않다. 찻잔 너머로 보이는 생활의 물건들. 이를테면 아무렇게나 놓인 TV 리모컨 같은 게 갑자기 시선에 걸리기라도 하면 차 마시는 시간의 경건함과 신비로움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만다. 무엇보다도 생활 소음이 문제다. 나의 첫 차 마시는 공간은 살고 있는 아파트의 베란다였다. 작은 차판 하나와 다구장을 배치하니 그럴듯하게 괜찮은 공간이 됐다. 그렇지만 어머니가 식사를 준비하고 가족들이 TV 보는 소리 등 차와 나의 시간에 끼어드는 각종 생활 소음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나처럼 진지하게 차 생활을 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이윽고 차 한 잔의 아름다움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조용한 공간을 꿈꾸게 된다.
그 로망을 완벽하게 구현한 곳이 일본의 전통 다실이다. 일본 차 문화를 확립한 인물 센 리큐(千利休)는 세속과 완전히 떨어진 차실을 고안했다. 리큐 다실은 ‘노지’라고 불리는 정원의 흙길을 지나야 다다를 수 있는 작은 초가집 형태다. 한 평도 안되는 작은 공간인데, 계절마다 차회에 쓰는 그릇, 먹는 음식, 장식할 꽃, 족자 등을 섬세하게 고른다. 그래서 이 다실은 ‘취미의 집’이라는 뜻의 스키야(數寄屋)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리큐 다실처럼 자연 속에 있는 공간은 아니지만, 차 공간을 생활에서 분리하기 위해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건물 3층, 작은 사무실을 빌렸다. 예쁜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야외 테라스가 있어서 마음에 들었다. 짙은 색 나무로 만든 다구장과 책상, 차에 대한 각종 책을 가져다 놓았다. 오래된 빈티지 오디오 세트를 옮겨 놓고 테라스에 남천과 오렌지재스민 등 식물까지 들이고 나니 제법 다실다운 공간이 됐다.
일단 깨끗하고 비어 있을 것. 잡냄새가 없을 것. 조용할 것. 다실이 갖추어야 할 필수 조건이다. 물론 공간을 갖추었다고 완벽한 차 생활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수류화개실’은 법정스님의 다실 이름인데,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물이 흐르고 꽃이 피는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일상의 공간 어디든 차를 아름답게 마시려 노력하면 그곳 또한 조용하고 더 깨끗하게, 향기롭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인선
채널A 앵커. 바쁜 일상 속 차를 마시는 시간으로 위로를 얻습니다. 책 <차라는 취향을 가꾸고 있습니다>를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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