쌓여가는 찻잔만큼 늘어난 추억 다구에 담긴 이야기를 통해 발견하는 팽주의 품격
인선23. 06. 11 · 읽음 337

찻자리에서 차를 내리는 사람을 흔히 '팽주(烹主)'라고 부른다. 팽주가 사용하는 도구는 그의 취향과 미적 감각, 함께 차를 마시는 사람에 대한 세심한 배려까지, 많은 것을 담고 있다. 어떤 기물을 쓰느냐가 팽주의 격을 나타내기도 한다. 값비싼 다구를 쓴다고 대단해 보이는 것은 아니다. 자신만의 이야기가 담긴 기물을 간직한 팽주에게선 깊은 내공이 느껴진다찻자리의 내공이 짧은 나는 기물 중에 그나마 모으기 쉬운 찻잔을 신중하게 고르는 편이다. 특히 여행 기념품으로 잔을 사오는 것을 좋아한다. 누군가에게 차를 대접할 추억이 담긴 찻잔에 차를 내면 대화도 풍성해지는 같다.

© 여인선

향이 좋은 우롱차를 내릴 때는 대만 여행에서 데려온 하얀 도자기 찻잔을 자주 꺼낸다. 3 가을 2 3 일정으로 빠듯하게 다녀온 여행이었다. 골동 다구를 파는 가게에 잠깐 들렀는데 대충 구경하고 나오려던 순간, 먼지 쌓인 기물들 사이로 찻잔 하나가 둥실 떠올랐다. 하얀 도자기에 청화로 강아지 마리가 그려진 높은 길이의 . 그림 주인공의 웃는 표정이 우리 둘째 강아지를 빼닮았다. ‘이건 밖에 없지.’ 골동품이라 흔하지 않고 나중에 다시 와도 있다는 보장도 없다. 그래서 특별하다. 이후 잔은 애완잔 되었고, 여행용 찻잔으로도 자주 챙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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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과 색이 은은한 백차나 녹차를 마실 때는 일본 삿포로에서 사 온 후지산 모양의 찻잔에 손이 간다. 편집숍에서 구입한 잔인데, 사케잔으로도 있는 형태다조금 두꺼워 입에 닿는 촉감이 투박할 같았지만 마감이 부드러워 온화하게 맛을 감싸준다. 찻잔을 뒤집은 뜨거운 물을 가득 부어 데워주면 후지산 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듯한 즐거운 장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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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여행에서 획득한 추억의 찻잔도 있다. 인스타그램에서 피드를 보고 관심을 갖게 경주의 '백암요'라는 도자기 요장을 찾아갔다. 남편은 도자기를 빚고 아내는 청화로 그림을 그린 전통 방식으로 도자기를 굽는 곳이다. 여행 짐을 줄이기 위해 기물은 하나만 고를 생각이었는데, 막상 구경하다 보니 사고 싶은 것이 많았다. 매화문과 모란문, 십장생문 전통 문양이 화려하게 그려진 다양한 다기는 실제로 보니 매력적이었다그중 유독 수수하고 작은 다기 세트 하나가 마음에 들었다. 수선화 송이가 소박하게 그려져 있는 1인용 개완과 찻잔 세트였는데, 보는 순간 적어 두었던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 구절이 생각났다.

고독한 순간을 선물이라 여기며 자신의 내면을 담담하게 바라보는 모습. 홀로 마시는 사람에게 어울리는 자세 아닐까그래서 주저없이 골랐다. 혼자 차를 마실 때는 수선화 잔이 어울린다.

마시는 사람들은 자신의 다구를 '다우(茶友)'라고도 부른다. 찻자리를 함께하는 친구라는 뜻이다. 동안 생활을 이어가며 친구같이 소중한 찻잔이 하나둘 늘었다. 하나하나 모은 찻잔의 수만큼 여행의 기억이, 찻자리의 추억이, 함께한 사람들과의 우정이 깊어진 같아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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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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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A 앵커. 바쁜 일상 속 차를 마시는 시간으로 위로를 얻습니다. 책 <차라는 취향을 가꾸고 있습니다>를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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