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란은 서양에서 온 게 아니라고?동서양의 경계처럼 서양란과 동양란의 구별도 명쾌하지 않아요
조현진23. 10. 23 · 읽음 831

난초 하면 어떤 모습이 떠오르나요? 붓으로 그린 듯 유려한 곡선의 잎사귀와 그 틈으로 피어난 향기롭고 우아한 꽃인가요? 어쩌면 꽃집에서 본, 개업 축하 리본을 달고 있는 화려한 꽃송이가 떠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흔히 난초라는 한 가지 이름으로 부르지만, 사실 난초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종을 일컫는 말입니다. 난초과에는 무려 2만 8,000종가량의 원종과 이를 토대로 개량한 수많은 품종이 있거든요. 주소에 비유하자면, 난초는 ‘OO아파트 몇 동 몇 호’처럼 집 하나를 뜻하는 게 아니라 수많은 집이 모인 아파트 단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 난초과는 국화과와 함께 속씨식물 중 가장 많은 종을 포함하니 단지보다 도시가 적합하겠군요.

난초라는 동네가 이렇게 넓은 만큼, 난초 한 종 한 종을 전부 알기는 어렵습니다. 도시의 모든 건물을 기억해 둘 수 없는 것처럼요. 대신 붓으로 그린 듯한 것을 동양란, 화려한 꽃을 피우는 것은 서양란. 이렇게 두 가지로 부르곤 합니다. 명쾌하지요? 여기서 이상한 점이 하나 생깁니다. 서양란은 이름과 달리 고향이 서양이 아닌 것이 많거든요.

ⓒ 조현진

서양란이라고 부르는 난초들과 그 고향

난초에 워낙 많은 종이 있는 만큼 서양란도 이 글에서 전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합니다. 대신,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접하게 되는 대표적인 서양란 몇 종류와 그들의 고향을 짚어보겠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낯익은 서양란은 호접란입니다. 새로 오픈한 식당 한편에서 반짝거리는 리본을 달고 보랏빛 꽃송이를 피우고 있거나, 결혼식장의 장식과 신부 부케 속에서 우아한 흰 꽃을 매단 호접란을 흔히 만날 수 있어요. 백화점 라운지나 호텔 로비의 고급스러운 꽃꽂이 틈에서도 자주 보이고요. 이들은 동남아시아에서 자라는 원종 호접란을 교배해 만든 품종이니, 호접란의 고향은 동양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호접란. Photo by marina yalanska on unsplash
호접란. Photo by marina yalanska on unsplash
호접란. Photo by marina yalanska on unsplash
호접란. Photo by marina yalanska on unsplash

호접란보다 드물지만 덴파레와 심비디움, 온시디움이라는 서양란도 종종 눈에 띕니다. 덴파레는 흰색이나 보라색 꽃을 피우는 품종을 꽃다발로 씁니다. 오랫동안 시들지 않기 때문에 일식집 상차림이나 고급 도시락의 장식에서도 볼 수 있어요. 심비디움은 초록색, 노란색, 분홍색 계열 품종이 주로 눈에 띄며 선물용 화분이나 꽃다발로 종종 사용합니다. 온시디움은 노란색 품종을 심어 가꾸는데, 춤추는 소녀를 닮은 향기로운 꽃을 피워요.

이들의 고향도 살펴볼까요? 덴파레는 주로 동남아시아에서 재배한 것을 수입해 오는데, 원종은 호주 동북부에 자생합니다. 호주는 흔히 서구권으로 보지만, ‘동양‘으로 분류되는 인도나 태국, 인도네시아보다도 더 동쪽에 위치한 점이 조금 미묘하군요. 심비디움은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북아시아부터 동남아시아, 호주 북부에 걸쳐 수많은 원종이 자랍니다. 동양권을 중심으로 분포하는 셈이죠. 그리고 온시디움은 멕시코에서 아르헨티나까지, 중남미 지역이 고향입니다.

심파디움. Photo by aravind reddy tarugu on unsplash
심파디움. Photo by aravind reddy tarugu on unsplash
중남미가 고향인 온디시움은 서양란으로 분류된다. Photo by cristina seaborn on unsplash
중남미가 고향인 온디시움은 서양란으로 분류된다. Photo by cristina seaborn on unsplash

낯선 마을을 산책하듯

원산지가 서양이 아닌 것이 많은데 왜 서양란이라고 부르게 되었을까요? 서양란은 원산지가 서양이라는 뜻이 아니라 영국을 중심으로 서양에서 개량하고 보급한 난초를 의미해요. 그렇기에 유럽이나 북미가 아니라 동남아시아, 남미 등지에서 유래한 서양란이 많은 것이지요. 반대로 동양란은 한국과 중국, 일본에서 가꾸는 보춘화, 한란, 풍란 등의 난초와 이들의 품종을 뜻합니다. 서양란과 달리 전부 한중일 삼국이 원산지입니다.

세계가 동양과 서양 둘로 나뉘지 않고 난초 품종을 원산지별로 나눈 것도 아니기에, 서양란과 동양란 중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 난초도 많습니다. 사람들이 가꾸거나 개량하지 않은 난초들이 세계 곳곳에 자라니까요. 이들을 편의상 야생란으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동양란과 서양란, 야생란 셋으로 나누기에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야생란으로 만들어낸 품종을 생각해 봅시다. 더 이상 야생종이 아니니 야생란이라고 부르기엔 어색하고, 개량한 국가에 따라 동양란 혹은 서양란으로 부르기엔 기존의 동∙서양란과 차이가 많겠지요.

동서양의 경계는 명쾌하지 않습니다. 서양란과 동양란의 구별도 마찬가지지요. 흐릿한 경계와 테두리 바깥에서 어떤 것은 존재가 희미해집니다. 그래서 조금은 어렵지만 팔레놉시스*, 덴드로비움 팔레놉시스**, 심비디움, 온시디움 같은 이름을 하나하나, 조금씩 공부합니다. 골목골목 낯선 집들이 늘어선 마을을 천천히 산책하는 기분으로요.

*팔레놉시스: 호접란류의 속명

**덴드로비움 팔레놉시스: 덴파레의 학명. 덴드로비움 비기붐으로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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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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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과 풍경을 그리는 일러스트레이터. 조경학을 전공했다. <식물 문답>을 출간했고, <환경과 조경>에 ‘풍경 감각’을 연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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