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배추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김태리가 첫 끼로 배추를 먹은 이유.
정원21. 12. 20 · 읽음 85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고즈넉한 시골 풍경과 영혼을 달래 주는 음식 그리고 혜원, 재하, 은숙 세 친구의 우정으로 보고 난 뒤에도 마음에 잔잔한 물결이 남는 작품이었습니다.

영화 속에서 혜원은 혼자가 된 집에 남아 엄마와의 추억을 리플레이하며 여러 음식을 만들어냅니다. 후에 오코노미야키라는 걸 알게 되는 양배추전은 제가 참 좋아하는 음식입니다. 달달한 양배추를 기본으로 기름에 튀기듯 부치고 마요네즈와 데리야키 소스로 완성하는 그 맛은, 맛이 없기가 더 어렵습니다. 영화에는 수제비와 배추전, 아카시아꽃 튀김, 감자 빵, 밤절임, 막걸리 등 다양한 요리가 등장합니다. 사실 막걸리는 텃밭을 넘어서 진짜 농부가 된 이들의 상징물일 수 있습니다. 벼농사를 짓고 쌀을 수확해 그 특별한 쌀로 막걸리를 빚는 농부들의 자부심을 이따금 마주하게 됩니다. 그때마다 드는 생각은 그들이야말로 더 특별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 고기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변영주 감독이 채식주의자인 영향도 있다고 어디선가 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감독이 육식주의자였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음식 리스트였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텃밭 농사를 짓다 보면 자연스레 먹는 일에 대하여 고민이 깊어지게 됩니다. 일단 심으라니까 심고 수확하라니까 했는데, 수확한 것을 어떻게 먹어야 할지 난감해 인터넷을 뒤지며 채소 요리를 찾기 시작하는 새내기 도시 농부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저도 처음에 많이 그랬습니다. 채소를 먹기 위해 고기를 굽기도 하고, 채소를 사용하기 위해 다시 장을 보아야 했습니다. 다 낯설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가장 단순하게 먹는 것이 가장 잘 먹는 거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이것저것 다양한 재료를 섞지 않고 작물 본연의 맛을 느끼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대로 먹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고기가 먹고 싶어 고기를 찾을지언정 작물을 해결하지 못해 고기를 찾는 일은 없습니다.

저는 도시에서 나고 자랐고, 남편은 시골에서 농사짓는 부모님을 보며 자랐습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제가 잘 아는 음식이 오코노미야키였다면, 남편이 잘 아는 음식은 배추전이었습니다. 추운 겨울날 도시에서의 고단한 생활을 잠시 접고 시골집에 온 주인공 혜원이 겨울 밭에서 눈을 헤치며 찾아낸 식량, 배추. 혜원이 두 손 호호 불어가며 찾아낸 겨울 배추 위로 남편의 목소리가 오버랩되었습니다. “아, 저 배추 꼬리.” 겨울 밭 배추를 보면서 저 배추는 배추 꼬리가 맛있는 토종 배추일까 하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요즘은 사람들이 거칠고 단단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 채소도 점점 부드러워진다고 합니다. 무만 해도 노지에서 수확한 토종 무는 단단한 데 비해 시중에 유통되는 일반적인 무는 현대인의 입맛에 맞게 좀 무르도록 개량한 것들입니다.

텃밭에서 농사를 지은 지 2년차 되었을 때일 것입니다. 김장용 배추를 수확하는데, 남편이 배추 밑동을 날렵하게 잘라내 저에게 내밀었습니다. 처음 보는 것이 입안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면, 대부분 한발 물러서게 되지 않나요? 그때 처음 맛보았던 쌉싸름한 배추 꼬리의 맛. 그건 늦가을의 충분한 맛이었습니다. 도시에서의 치열하고도 남루한 삶을 뒤로하고 고향 집에 이른 혜원이 겨울 밭에서 만난 차갑고도 뜨거운 배추의 맛. 그 맛을 여태 보지 못했네요. 올겨울엔 한번 도전해볼까 합니다.

오후에 장을 보고 왔습니다. 동네 텃밭 한쪽에서 작은 팜 마켓이 열리는 날이었습니다. 욕심 없이 오늘 먹을 것만 담아 와야지 하고 나섰는데, 결국에는 가지고 간 장바구니를 한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선물까지 한아름 받아왔습니다. 선물을 절대로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입니다.

흑토마토, 로마 토마토, 노랑 주키니를 먹으려고 샀고, 꽃다발을 샀습니다. 그리고 당조고추와 가지고추, 호박잎, 옥수수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유럽 샐러드 상추도 이탤리언 파슬리도 다 탐이 났지만, 다 먹지 못할 것을 알아 포기했습니다. 그냥 두고 오려니 발이 안 떨어져 사진을 몇 컷 찍었고요. 마켓을 연 농부와 배추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금 배추를 심는 건 무리겠지요?”

“아무래도 너무 덥지요.”

집에 김치가 떨어졌고, 게으름을 부리다가 밭 한쪽이 놀고 있어서 도시 농부 선배인 그녀에게 푸념하듯 던진 말이었고, 적절한 대답이었습니다.

돌아가는 길에 모종 가게에 들렀습니다. 작물을 밭에 심는 행위 자체가 어울리지 않는 불볕더위에 슬슬 바람이나 쐬며 돌아가자고 들른 것이었습니다.

능곡시장에 가면 버스 정류장 앞에 하나, 은행과 시장으로 동시에 통하는 길목에 하나, 그렇게 작은 모종 가게가 두 개 있습니다. 두 곳 모두 주로 할머니들이 현금을 받고 모종을 파시는데, “이거 지금 심어도 돼요?”라고 물어보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말씀하십니다. “그럼! 지금 딱 심으면 좋지!” 하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됩니다. 예측할 수 없는 기후 변화나 이상 기온을 반영하지 못한 대답일 경우가 많을 뿐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유구한 세월 계속되어온 사계절 기후에 맞지 않게 무조건 다 “오케이”라고 대답하시기 때문입니다.

모종 가게에는 봄날처럼 많은 채소가 피어 있었습니다. 배추를 아무 때나 먹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한 어떤 여자가 올 것을 알았는지, 그 가운데 배추도 있었습니다.

“이 배추, 지금 심어도 될까요?”

“추석 배추야. 김장 전에 작게 먹는 배추.”

“아……”

뭐, 안 될 건 없지요. 선택은 각자의 몫입니다. 김장을 위해 배추, 무, 쪽파 등 온갖 것을 다 심고 김장과 동시에 빈 밭을 만드는 것도, 겨우내 발 동동 구르며 추위를 이기는 배추를 돌보다가 이듬해 샛노란 배추꽃을 보는 것도, 계절과 상관없이 키워 채 여물지 못한 것을 서둘러 캐 먹는 것도 다 자유입니다. 그 길에 무엇을 만나게 될지 모르니, 쉽게 정답이라는 것을 나누지 않는 게 습관이 되었습니다.

오늘 산 꽃 이름 하나하나가 음표처럼 노랫말처럼 말을 걸어오는 여름밤입니다. 에키네시아, 니겔라, 오레가노꽃, 페인티드세이지, 당근꽃, 가우라, 천일홍, 백일홍, 메리골드……

김장 배추는 8월 하순 더위가 한풀 꺾이고 난 뒤 심습니다. 11월 중순부터 말쯤 수확해서 김장을 해요.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 등장하는 겨울 배추는 보통 서울배추, 조선배추라고 부르는 우리나라 토종 배추입니다. 씨앗을 구해 늦여름에 뿌리고 이듬해 3월 이후부터 잘 자란 잎을 수확해요. 기온이 너무 심하게 떨어지면 배추가 얼지 않도록 비닐로 보온을 해줄 필요가 있는데, 눈이 쌓이면 눈 자체가 배추를 덮어 보온 효과를 주기도 합니다.

페인티드세이지는 포엽이 꽃보다 아름다워 사랑받는 식물입니다. 4월 즈음 노지에 씨를 뿌려 기를 수 있어요. 다른 허브류와 마찬가지로 약용으로 많이 사용하는데, 관상용으로도 아름다워 정원 식물로 사랑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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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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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서 들려오는 낱말들을 모으며 느리게 삽니다. 지은 책으로 <실용낭만 취미살이> <작고 소중한 나의 텃밭> <떡볶이 공부책> <짜장면 공부책>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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