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식 도전을 위한 몇 가지 조건 <야생의 식탁> 저자 모 와일드의 야생식 도전기, 그 시작에 앞서
야생의 식탁23. 11. 22 · 읽음 59

나는 싱크대에서 묵묵히 비트 뿌리를 문질러 씻고 있다. 누군가 지금 내 모습을 본다면 ‘애처롭게’라는 표현을 쓸지도 모른다. 그렇게 보일 수 있다는 건 인정하지만, 나로서는 ‘경건하게’라 말하고 싶다. 원래 비트 뿌리를 그렇게 좋아하진 않는다. 어릴 때는 학교 급식에 나오던 비트 피클을 끔찍이 싫어한 나머지 먹지 않고 팬티 속에 숨긴 채 식당을 나섰다가 엄청난 곤경에 빠진 적도 있다. 얇은 청록색 여름 교복 치마 위로 새빨간 비트 즙이 스며 나왔고, 그걸 본 나는 겁에 질려 황급히 학교 보건실로 달려갔다. 그때 난 겨우 일곱 살이었으니까!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지금은 비트 뿌리와 화해했다. 아니, 사실은 썩 좋아하는 편이다. 가장자리가 달큼하고 쫄깃해질 때까지 구워 먹거나, 민트와 크림을 섞은 소스에 찍어 먹는 비트는 그리울 것 같다고 말해도 될 정도다. 갑자기 이 커다란 뿌리에 감사하는 마음이 솟는다. 작은 거라도 두세 개만 있으면 한 끼 식사가 되는 채소라니.

비트가 그리울 거라고 한 이유는 내일부터 일 년 내내 야생식만 먹을 계획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비트 뿌리가 내 ‘최후의 만찬’인 셈이다.

비가 오는 11월 아침, 문득 이 비트 뿌리만큼의 열량을 섭취하려면 얼마나 많은 야생식물을 채취해야 하는지 새삼 돌아보게 된다. 옛날 영국에서는 야생 비트를 흔히 볼 수 있었지만 당시에는 비트 뿌리가 지금처럼 튼실하지 않았다는 아이러니도. 비트 뿌리를 튼실하게 만든 것은 이 식물을 최음제로 높이 평가했던 고대 로마인들이다. 폼페이에 남아 있는 루파나레(로마의 공식 성매매 업소)의 프레스코 벽화에도 섹스를 하는 커플 사이에 큼직한 비트 뿌리가 그려져 있어 당시 비트의 인기를 증명한다고 한다. 최초로 비트를 교배하여 오늘날 우리가 즐겨 먹는 커다란 개량종을 만들어 낸 건 로마인들이었다는 얘기다.

나 역시 석기시대의 조상들처럼 야생 비트 잎을 좋아한다. 비트 잎을 쪄서 녹인 버터를 조금 곁들이면…. 그러고 보니 이 점도 생각해 볼 문제다. 야생식의 기준을 찾아 어느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까? 음식에 버터를 넣어 먹어도 될까? 버터는 야생식이 아니지만, 인간은 적어도 1만 2000년 전부터 염소와 양을 길러 왔다. 몇 가지 기본 규칙을 확실히 정해 두어야 할 것 같다.

산책길에 만난 큰갈대버섯아재비와 함께. ⓒ 모 와일드/야생의 식탁
산책길에 만난 큰갈대버섯아재비와 함께. ⓒ 모 와일드/야생의 식탁
모 와일드가 사는 스코틀랜드의 풍경. ⓒ 모 와일드/야생의 식탁
모 와일드가 사는 스코틀랜드의 풍경. ⓒ 모 와일드/야생의 식탁
채취 도구들. ⓒ 모 와일드/야생의 식탁
채취 도구들. ⓒ 모 와일드/야생의 식탁

조건

<콜린스 영어 사전>에 따르면 채취(forage)의 정의는 “사냥, 낚시, 식물 채집으로 식량을 획득하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 버섯과 해조류도 추가하려고 한다. 내가 사람들에게 채취 요령을 가르쳐 온 지 15년쯤 되었는데,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항상 똑같다. “선생님은 정말 채취만으로 한 해 동안 먹고살 수 있으세요?”

나는 이 문제를 오랫동안 숙고해 왔고, 다음의 네 가지 조건만 충족된다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① 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출연자가 아닌 만큼, 자연 탐험가인 베어 그릴스처럼 전혀 모르는 지역을 찾아가진 않을 것이다. 오히려 내가 한 해의 식생을 잘 아는 지역에서 시작해야 한다. 인간 이외의 다른 생물종들도 서식할 곳을 까다롭게 고르는 걸 보면 알 수 있듯이, 서식지에 관한 지식은 생존에 필수적이다.

② 해변, 울타리, 숲 등 다양한 지형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계절이 바뀌면 자연 식재료의 위치도 바뀌는 만큼, 발견한 음식을 마음대로 수확할 수 있어야 한다. 다행히 스코틀랜드에서는 누구에게나 배회할 권리(공유지와 사유지를 포함하여 자연 속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원하는 활동을 할 권리—옮긴이)가 있다.

③ 나는 평소에 주로 식물과 해조류, 버섯을 먹지만 겨울에 굶주리지 않으려면 야생동물과 생선을 먹어야 할 수도 있다. 지금까지는 90퍼센트 정도 채식주의자로 살아왔지만 이제는 무엇이든 먹을 각오를 해야 한다. 스코틀랜드에서는 바나나가 자라지 않으니까.

④ 겨울에 대비할 시간을 충분히 갖기 위해 춘분 직후에 실험을 시작해야 한다. (하지만 이 부분은 이미 틀린 것 같다!) 

이 글은 <야생의 식탁>(모 와일드 지음, 신소희 옮김, 부키) 중 프롤로그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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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의 식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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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식물을 사랑하는 약초 연구자 모 와일드. <야생의 식탁>은 그녀가 자신이 사는 스코틀랜드 중부 자연에서 나고 자란 것에만 의지하며 보낸 사계절을 기록한 책이다. 일 년간 마트 대신 야생을 누비며 발견한 동식물의 생태부터 채취 노하우, 야생식 레시피까지 풍요로운 이야기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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