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아오모리를 방문했을 때 솔솔 부는 가을바람에 하늘거리는 추명국을 처음 만났다. 추명국의 원산지답게 정갈한 일본 주택의 정원마다 핑크색 추명국이 나비처럼 팔락거리고 있었다. 시폰처럼 한들거리는 추명국은 내 마음속에 쏙 들어와 앉았다. 한국에 돌아와서 곧바로 추명국을 구입했다. 생각보다 많이 유통되고 있는 꽃이었다. 요즘에는 숙근초 시장이 활성화되어 워낙 다양한 꽃이 수입되고, 재배되기 때문에 못 구하는 꽃이 거의 없을 정도다. 그리하여 추명국도 클릭 한 번으로 구입해서 심었다.

5~6년 전에 처음 찍박골 정원에 심기 시작해서 지금은 여기저기 흐드러지게 자라고, 또 어느 곳에는 솎아줘야 할 만큼 넘쳐나지만, 처음 2~3년은 애간장을 녹일 만큼 잘 자라지 않았다. 어느 해 봄에는 자라고 있던 추명국이 절반도 넘게 없어져 버린 적도 있다. 어떤 이는 건조해야 잘 자란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촉촉한 땅에서 잘 자란다고 했다. 건조한 해도 지나고, 비가 많은 해도 지나면서 추명국은 습기가 있는 토양에 맞는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 후로는 물이 귀한 봄이 되면 반드시 따로 물을 챙겨주면서 점점 세력을 넓혀갔다. 그러나 일단 뿌리를 내리고 나면 웬만큼 건조한 땅에서도 잘 살아간다.
흰색 추명국은 핑크색보다 더 어렵게 자리를 잡았다. 처음에는 흰색 품종이 더 키우기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그보다는 흰색 추명국을 심은 정원의 토양이 더 건조했던 것 같다. 제법 많은 모종을 심었는데, 2~3년이 지날 때까지 한두 줄기의 꽃대밖에 올라오지 않았다. 3년 정도 지나면서 흰색 추명국에 대한 기대와 기억이 없어질 즈음에 튼실한 두 포기에서 흰색 추명국이 올라왔다. 건조한 땅에서 혼자 낑낑대며 뿌리를 내렸을 것이다. 그 오랜 시간 동안! 그리고 살만해지니까, 드디어 세상 밖으로 찬란하게 피어났을 것이다. 풍성하게 핀 흰 추명국을 보는 순간 첫마디는 “살아있었구나”였다. 마치 죽었다고 생각한 이산가족이 극적으로 혈육임을 알아보는 순간처럼….

추명국의 목화솜 같은 씨앗도 가을철 정원 풍경에 큰 몫을 한다. 흰 솜털이 복슬복슬 터져 나와서 멀리 보면 꽃송이 같이 어여쁘다. 가을로 갈수록 꽃이 피는 초화류 식물은 드물어진다. 그래서 함께 어울려 피는 꽃들이 제한적이다. 아스타, 토종솔체, 꿩의비름, 다알리아, 바늘꽃 등 가을까지 피는 꽃들과 조합하면 가을의 꽃 풍경을 만들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보라색 아스타와 보라색 토종솔체를 섞어 심으면 추명국이 더 돋보이는 것 같다. 보라색과 핑크색은 정원에서의 클래식이지 않은가!
김경희
도시를 떠나 강원도 인제 찍박골에 터를 잡은 뒤 나만의 정원을 가꾸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식물을 사랑하는 초보 정원사가 아홉 개의 테마 정원을 조성하기까지, 10년간 경험한 실패담과 가드닝 노하우를 담아 <찍박골정원>을 펴냈다. blog.naver.com/mindy2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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