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빨리 찾아오는 인제, 찍박골 정원에서는 가을에 꽃 피는 식물을 키우기가 어렵다. 10월 중순이면 서리가 내리기 때문에 제대로 꽃이 피기도 전에 서리에 사그라져 버린다. 그래서 가을에 꽃이 피는 용담이나 투구꽃은 키울 수가 없다. 꽃 피는 식물로 가을 정원을 가꾸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얘기다. 이곳의 가을은 단풍과 그라스의 조합이다. 꽃보다 아름다운 단풍과 꽃만큼 세련된 그라스가 가을 정원의 주인공이 된다. 수크령, 새풀, 홍띠, 억새, 지브라, 헤비메탈, 초코라타, 아다지오, 몰리니아 등 시들어가는 정원에 그라스의 꽃대가 한들거리면 다시 가을 향기가 나는 멋스러운 정원이 된다.

세계적 정원 디자이너 피트 아우돌프(Peat Oudolf)가 돌풍을 일으킨 자연주의 정원이 국내에 소개되면서 자연주의 정원의 상징과도 같은 그라스 또한 정원 식물로 이목을 끌기 시작했다. 그런데 억새를 비롯해 정원에서 많이 사용하는 그라스는 쉽게 쓰러지는 데다가 덩치가 워낙 큰 편이다. 겨울까지 남아서 말라버린 그라스에 함박눈이 내리면 풀썩 주저앉아 버리는데, 마치 초가집 한 채가 쓰러져 있는 것 같다. 양평에 사는 정원 친구는 겨울 어느 날, 정원에 나갔다가 쓰러진 그라스 속에서 튀어나온 고라니를 보고는 간이 떨어질 만큼 놀랐다고 했다. 고라니는 또 얼마나 놀랐을까나? 따뜻한 그라스 속에서 겨울을 나고 있는 중이었나 보다.
몇 년 동안 그라스를 키우면서 너무 심하게 쓰러지는 아이들을 하나씩 없애고 있는 중이다. 제일 먼저 숙청(?) 대상이 된 그라스는 그 유명한 칼 푀르스터(Karl Foerster)였다. 이른 봄부터 새싹이 돋는 이 아이는 늦봄이면 이미 1미터 이상 자라고, 여름이면 1.5미터를 훌쩍 넘으며, 가을에는 누렇게 익은 벼 이삭처럼 색깔이 노랗게 물든다. 문제는 비가 오면 땅바닥에 끌릴 만큼 쓰러져 버린다는 점이다. 장마가 오기 전에 엄지손가락 만한 굵기의 고춧대를 이용해서 세워놓지만 별로 쓸모가 없다. 묶는 지점에서 이미 꺾여서 쓰러지기 때문이다. 장마가 끝나면 모두 잘라버리는 일을 서너 해 반복한 뒤 결국 모두 뽑아버렸다. 금년에 독일연방정원박람회 ‘BUGA 2023’에 참석해 독일 정원을 둘러보고는 크게 애달파하지 않기로 했다. 독일에서 만난 칼 푀르스터 그라스는 1미터 남짓한 키에 덩치도 크지 않고, 꼿꼿하게 서 있는 모습이 정원의 여주인공 같았다. 그라스는 여름이 아주 건조한 유럽에서만 멋지다는 결론을 내렸다. 고온다습한 우리나라의 여름을 나기에는 너무나 부적절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차떼고, 포떼고’ 남은 그라스는 몇 종 되지 않는다. 파니쿰 계통의 헤비메탈, 초코라타, 벼과에 속하는 새풀, 수크령 하멜른, 홍띠 정도? 그래서 그라스의 매력을 살리면서도 여름 기후를 견뎌낼 수 있고 사이즈가 적당한 품종을 찾아 속 썩이는 그라스를 대체하고 있는 중이다. 억새 ‘아다지오(adagio)’, 몰리니아 ‘무어헥세(moorhexe)’, 미니억새 ‘리틀 키튼(little kitten)’이 새로 들인 아이들이다. 이들은 늦은 봄이 되어야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다. 여름철에 키가 자라서 한여름이나 늦여름부터 꽃대를 올리고 가을이 되면 성숙한 모습으로 가을의 여인이 된다. 그래서 가을 정원에서는 꽃 대신 서 있는 단풍과 그라스가 꽃만큼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어준다. 꽃이 없다고 서운해하지 않는다. 가을에는 가을에 맞는 정원의 멋이 있다. 때가 되어 자연스럽게 맞는 모습이 아름답지 않은가? 보톡스로 풍선처럼 부은 얼굴보다는 눈가에 잔잔하게 주름진 미소가 아름다운 것처럼 말이다.
김경희
도시를 떠나 강원도 인제 찍박골에 터를 잡은 뒤 나만의 정원을 가꾸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식물을 사랑하는 초보 정원사가 아홉 개의 테마 정원을 조성하기까지, 10년간 경험한 실패담과 가드닝 노하우를 담아 <찍박골정원>을 펴냈다. blog.naver.com/mindy2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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