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안 들음의 역사
북글엄24. 08. 21 · 읽음 55

뜬금없이 우영우 정주행 중이다. 우영우 머리가 많이 친숙하다 했더니 결혼할 때 내 머리였던 것이 기억 났다.

 

성의 없는 결혼 준비일지라도 스드메는 있어야 하니까, ‘스’는 빼더라도 ‘드메’를 위해 결혼준비업체에 첫 상담을 갔던 날. 착석하자마자 들었던 첫 마디는 “신부님 이제부터 머리는 절대 손대지 말고 무조건 기르셔야 해요.”였다. 당시 내 머리는 중단발과 가슴께 사이 어디쯤까지 내려오는 어중간한 길이의 (농심) 자갈치 머리. 

요즘은 그래도 신부의 헤어스타일이 좀 더 자유롭고 다양해졌겠지만, 14년 전만 해도 아직도 신부 머리는 ‘미스코리아 머리’ 만큼이나 전형적인 데가 있었다. 모양이 아무리 다채롭다 한들 올림머리의 대명사 같은 거였달까. 사람 머리카락을 이렇게 여러 방법으로 올릴 수 있구나 하며 두꺼운 책자를 넘기는 중에 직원 분이 “지금 머리에서 최대한 기르셔야 여기서 할 수 있는 스타일이 많아지니까 많이 길러오세요~ 야한 생각도 좀 하고 😉” 하셨다. 웃으면서 “네.” 했던 나는 몇 주 후 단발머리로 싹둑 잘라버리게 된다. 

 

드레스 피팅날 나를 보신 직원 분들마다 기함을 하셨다. “왜 그러셨어요!!!!” 나는 또 웃었다. “그냥요. 자르고 싶어서요.” 
드레스를 세 벌째쯤 입어볼 때 이모님 — 그 때쯤이면 이모님이 돼있다 — 께서 “근데 자꾸 보니까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기도 하다. 단발머리에는 처음 입혀보는데.” 하셨다. 그렇게 결국 초코송이 머리로 결혼식을 했다. 

 

고등학생 때는 오히려 머리가 좀 더 길었다. 당시 용모 규제 기준은 두발 귀 밑 3센치, 구두 굽 2센치 이하였다. 두어 달에 한 번 불시에 선도부 선생님이 걸이용 끈까지 달린 작대기와 가위를 들고 모든 학급을 검사하셨다. 책상과 책상 사이를 빠르게 지나가시면서 두발 길이를, 다음으로는 신발장을 검사하셨었는데, 내 머리는 귀 밑 7-10센치는 될 법 하고 신발굽은 5센치였을 때도 걸린 적이 없었다. 

 

중학생 땐 학교 후문 쪽 수퍼에서 서주 빠빠오(꽝꽝 언 오렌지주스를 숟가락으로 사각사각 긁어 먹는 느낌 아는 사람?)를 사먹는 게 유행이었다. 여름방학에도 자율학습이라는 이름의 ‘자율도 아니고 학습도 아닌 것’을 위해 학교에 나가야 했는데, 선풍기 한 대 뿐이던 교실에 중3 50명이 앉아 있다보니 학습 보다는 빠빠오 생각이 더 간절하지 않았겠는가. 중2병도 넘은 고인물 3학년이 매우 할 법한 생각으로 빠빠오 주문을 받고 한두명이 몰래 나가서 학교 담을 넘어 사오는 범행을 저지르곤 했는데, ‘혹시 걸려도 안 혼날 것 같은 사람’으로 내가 다녀오기도 했다. 아마 선생님들도 간혹 눈 감아주시지 않았을까. 빠빠오로도 안 되던 어느 날엔 친구들이랑 튀어서 노래방에 가버리기도 했지만.

 

나의 ‘말 안 들음’이 어째서 발각도 안 되거나 때로는 용인도 될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면, 말을 안 들을 것 같지 않기 때문, 또 그게 반항이 아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냥 제 생각대로 하고 안 할 뿐이지 그래도 할 건 하겠지 하는 최소한의 믿음. 그리고 그에 못지 않게 안 하고 싶은 건 정말 안 하고 싶었던 것 같아 넘어가는 관용. 소위 모범생들과도 노는 애들과도 잘 지내는 부반장이었던 (중고딩 내내 부반장만) 탓도 있었겠지만. 

 

이렇게 지켜져 온 나의 정체성은 결혼 후 얼굴도 뵌 적 없는 분에 의해 공식적인 효력을 가진 말로 정립되는데, 나는 그 말을 내 사주를 보고 오신 시어머니를 통해 듣고 빵 터져 크게 웃고야 말았다. 

 

“니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말란다. 어차피 네~ 해놓고 지 하고 싶은대로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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