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에르노 <얼어붙은 여자>
북글엄24. 08. 27 · 읽음 77

 

나의 결혼생활은 괜찮은 편이다. 그렇다고 생각한다. 남편은 밖에서 기능하고 나는 그것이 충분히 자유롭게 가능하도록 나머지를 지키고 돌본다. (남편은 내가 안에서 기능하는 것으로 충분하도록 밖을 책임지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양쪽 다 사실일 것이다.) 

 

나는 독립적이고 남편은 협조적이며, 사소한 것들 모조리 반대인 성향으로 서로 골짜기를 메꾸면서 각자 다른 타이밍을 들고 나는 호흡으로 이용하도록 만들어 온 점들은 이 결혼생활의 큰 장점이다. 근본적으로 상대방을 지지하고 지원할 의향이 있고 — 의향이 있다는 건 생각보다 큰 일이다 — 서로 고맙다거나 수고가 많다는 표현을 자주 하는 편이다. 

 

일면이 있으면 이면이 있게 마련. 기름칠이 잘 된 채 굴러가는 톱니 같거나 균형이 제법 잘 잡힌 듯한 생활을 살짝 뒤집어 보면 꼭 누구의 잘못이랄 수 없는 묘한 구조적 불평등이 있다. 

 

남편은 필요와 욕구에 따라 (비교적) 자유롭게 활동 내용과 반경을 정한다. 그러나 나의 필요가 — 욕구는 차치하고서라도 — 평소 반경(아이와 개의 리듬이 요구하는 시간과 장소)을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나를 대신해 돌봄노동을 해줄 사람이나 기관을 시간을 이어붙여서라도 찾아야 하고, 그렇게 진 신세가 내 빚이 된다. 돌봄의 시간 동안 함께 이루어지지 못한 가사노동이 추가노동시간이 되는 것은 물론이다. 남편은 느끼건 느끼지 못하건 나를 상시 무보수 백업으로 갖고 있으나 나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간혹 남편이 기꺼이 백업을 해줄 때가 있다는 것이 고맙기는 하더라도 근본적인 자유 확보의 구조 자체를 바꾸지는 못한다. 

 

또 다른 문제 중의 하나는 아무리 우리 부부가 안팎으로 조화로운 가정을 이루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 둘을 개인으로서 시장에 세워보면 드러난다. 출산과 함께 했던 최초의 역할 분담 시에 지극히 자연스러웠던 포지셔닝이 10년 후에 만든 것은 10년 경력의 사업가와 10년 경력단절의 전업주부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성장해 왔다고 생각하지만 사회는 내 노동의 가치를 돈으로 인정해 주지 않는다. 내내 김OO으로 구상하고 도전하고 성공하고 실패하고 만나고 휴식하는 리듬을 가진 남편과, 아이와 개의 상황에 따라 전OO를 껐다 켰다 비율을 달리 하고 확장보다 제한 속에 살며 어떤 리듬을 잃어버린 내가 사회인, 경제인으로서 같을 수는 없다. 내가 직접적인 수익을 벌어들이는 일을 하려 한다 해도 가정의 노동과 반경에서 남편 만큼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고, 간헐적인 워킹맘 패턴의 생활 때 역시 그랬다. 

 

애초에 전업주부의 탄생 자체가 자본주의의 탄생과 함께 하지 않았는가. 가사를 한 사람(여자)에게 몰아줌으로써 자본가가 집에서 충전된 노동자를 효율적으로 써먹을 수 있는 구조로 말이다. 역할을 ‘나누었다’고 하지만 능력치나 잠재력과 관계 없이 한 쪽이 ‘예속되는’ 구도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 균형은 내가 범위 밖을 벗어나지 않는 만큼에 한한 것이고, 균형이 곧 평등은 아니다. 구조상 역할의 성격이 그러니 어쩔 수 없다고만 하기에도 충분치 않다. 다양한 관습적, 감정적 원인으로 흘러가는 일상의 풍경 속에서 똑 부러지게 말할 수 없어 주목받지도 못하는 감정의 부산물들에도 일부의 진실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얼어붙은 여자>에는 그런 진실들, 실제로 살아왔고 살고 있는 감정적 풍경이 날카롭게 묘사되어 있다. 한 소녀가 자라서 두 아이의 엄마가 되기까지의 이야기. 내가 태어난 해에 쓰인 책인데, 놀랍게도 — 또는 놀라우면 좋을텐데 놀랍지 않게도 — 현재와도 많이 닮아있다. 

 

책을 읽은 후 가장 많이 남은 것은 ‘이해’이다. 우회하지도 포장하지도 않는 있는 그대로의 내면의 작용을 묘사한, 누구에게도 이렇게 말하지 못했지만 내가 겪었던 생각 그대로가 담긴 문장들을 읽으면서 시절의 한복판에서도 정의내리지 못했던 나를 다시 만나 이해받았다. 또 이렇게 적확한 표현의 문학이라면 함께 살면서도 채 다 함께 살지 못하는 부부가 서로를 공격하지 않고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작품의 존재에 감사했다. 

 

여자들만의 피눈물 나는 공감의 작품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자가 여자만을, 남자가 남자만을 살지 않는다. 이해는 그런 인식으로부터 시작한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읽었으면 좋겠다. 나는 과연 나의 남편에게 이 책을 읽힐 수 있을까? 

2
북글엄
팔로워

북 치고 글 쓰는 엄마, 북글엄입니다.

댓글 2

첫 번째 댓글을 입력해 주세요.

전체 스토리

    이런 글은 어떠세요? 👀

    신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