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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설악의 가을_사농의 작은 숲
사농24. 10. 27 · 읽음 136

오랜만의 산행입니다. 엽렵한 친구가 설악산을 가자고 연락이 왔습니다. 제일 좋은 날씨와 단풍이 적절히 들 시기를 고려해 날을 정해왔으니 가야지요. 친구의 노고에 편승해 봉정암으로 향합니다.

 

속초에서 버스를 타고 30분이 안되어 백담마을에 도착해 백담사로 갑니다. 마을에는 안개가 자욱히 내려 앉았는데 저 멀리 봉우리들은 또렷하네요. 살짝 추운 기온에 얼른 걸으며 몸을 데우니 금세 셔틀버스 승강장에 도착했어요. 백담마을에서 백담사까지 걸어갈 수는 있지만 꽤 거리가 멀고 중간에는 인도가 없어지니 인당 2500원인 버스를 꼭 타시길 권장합니다. 차로는 갈 수 없어요. 버스의 왼편으로 타면 계곡과 설악이 어우러진 풍경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떨어진 솔잎이 푹신한 길을 만들어줍니다. @mua_muoui

 

 

 

세번째 봉정암입니다. 처음에는 뭣도 모르고 산에 올라 물도 없고 해는 지고 궁여지책으로 예약이 꽉찬 봉정암에서 쭈그리고 구석에 앉아 밤을 지샜어요. 공양시간에 주시는 따뜻한 미역국이 얼마나 맛있던지요. 두번째는 서북능선을 타고 대청봉에서 백담사로 하산하는 긴 산행에 지쳐있었는데 봉정암의 무료커피를 마시고 무사히 내려온 기억이 있습니다. 매번 신세를 져서 언제 갚아야지 생각만 했는데, 그날이 오늘입니다. 고심해서 고른 말린 미역 한봉지를 들고 길을 나섭니다. 

 

 

 

 

 

 

 

설악의 가을은 전국의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힘이 있습니다. 노랗고 붉은 가운데 가을 하늘은 어찌나 파란지 그간 핸드폰과 컴퓨터에 시달린 눈이 시원해집니다. 백담사에서 영시암까지는 대부분 평지라 무척 쉽습니다. 백담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며 걷다보면 벌써? 하고 도착합니다. 사진에 한그루 서있는 나무에 빨간 열매가 보이시나요?

 

 

 

 

꽃사과나무 @mua_muoui

 

 

 

 

영시암 보살님께 여쭤보니 꽃사과나무라 하십니다. 이 나무는 계곡와 영시암을 번갈아 보며 설악의 모든 계절을 겪어내겠지요. 주렁주렁 달린 빨간 열매가 그의 1년의 노력을 말해주는 듯 합니다. 꽃사과로 술을 담가 먹으면 피로회복, 식욕증진, 신경과민, 불면증, 변비 등을 치유하는 효과가 있어 약술로 마시기도 한다네요. (출처: 두산백과) 나중에 꼭 심을 나무 리스트에 올려두었습니다.

 

 

 

 

 

 

 

 

 발걸음을 옮기기가 힘듭니다. 들어본 적 없는 새소리에 멈춰 서 가만히 눈을 감아보고 물감을 퍼부은 것 같은 나뭇잎들을 입을 헤 벌리고 쳐다봐야 하거든요. 핸드폰 카메라를 켜서 이리저리 찍어보지만 이 풍경을 담아내기엔 아직 인간의 기술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영시암에서 봉정암으로 향하는 길에 이 노란잎이 가득합니다. 손바닥보다 큰 노란 잎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으니 꼭 유치원에 놀러온 것 같습니다. 가만히 보니 빨간 열매도 맺혀있는 이 나무는 생강나무입니다. 봄의 전령사로 불리기도 해요. 이른 봄에 잎이 나기 전 노란 꽃이 먼저 피거든요. 이 꽃으로 차를 만들어 마실 수 있어요. 산수유와 비슷한데 생강나무는 잎이나 가지를 꺾으면 생강과 비슷한 향이 납니다. 구별을 위해 꺾지는 마세요. 다른 방법으로도 알 수 있으니까요. 생강나무의 줄기는 매끄럽고 산수유는 거칠답니다.

 

 

 

 

 

 

 

 

땅에 떨어진 생강나무의 빨간 열매 속에는 옹골찬 주황빛 씨앗이 들어있습니다. 자연은 어떻게 이리 아름답게 살아갈까요. 나무가 태어나고 살아가고 죽는 모든 과정에서 그는 존엄을 잃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도 해 끼치지 않고 묵묵히 말이에요. 

 

 

 

 

 

 

 

 

 

계곡물이 참 맑습니다. 살짝 손가락을 담그니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에 정신이 번쩍 듭니다. 영시암에서 봉정암까지는 매 풍경이 장관이지만 자비 없는 오르막에 시선을 놓치기 쉬워요. 숨을 고르며 천천히 먼 봉우리들도 한번씩 보며 가야 설악의 가을을 즐길 수 있답니다.

 

 

 

 



 

 

산은 빛과 어둠도, 삶과 죽음도 동시에 모두 품으며 모든 생명의 시작과 결실, 끝을 개입 없이 묵묵히 바라봅니다. 가을의 결실을 맺은 나무들은 훗날을 위해 잎을 모두 떨궜습니다. 바닥에 쌓인 수북한 낙엽은 땅에 영양을 공급하며 새로운 탄생들을 도울테지요. 거룩한 순환 속에서 천천히 숨을 쉬어봅니다.

 

 

 

 

봉정암 @mua_muoui

 

 

 

해발 1,244m에 위치한 봉정암은 이미 단풍이 다 지고 겨울을 맞을 채비를 끝냈습니다. 마지막 깔딱고개에서는 정말 심장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어요. 적멸보궁에 들러 가져간 미역을 올리고 뜨끈한 미역국을 또 얻습니다. 밑반찬으로 신선한 오이무침이 나왔는데 어찌나 아삭하던지요. 누군가가 오이를 힘들게 지고 오셨을 생각에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먹었습니다. 오이의 단면에 알알히 박힌 씨앗을 보며 우린 언제나 많은 존재들의 결실 속에 둘러 싸여 살고 있구나란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나는 지구에 보탬이 될 결실들을 내고 있는지 사뭇 궁금해졌어요.

 

 

 

 

 

 

 

 

결실은 성과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수치나 글자로 알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요. 내 안에 단단히 여무는 투명한 것들, 어떤 풍파에도 꺾이지 않고 삭지 않는 그런 것들이 결실이지요. 필요한 누군가에게 언제든 부드럽게 흘려보내고 싶은 저의 결실들은 오늘도 알알히 내면에서 익어가는 중입니다.

 

 

 

 

설악산에서 @mua_muou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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