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꽤 하는 편이다. 꽤 하는 편이라는 게 정확한 기준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나름의 양이 있다. 끝까지, 그러니까 술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하고 마셔 본 적은 없어서 정확히 어느 시점에 소위 ‘꽐라’가 나는지 정확히는 모른다. 대충 소주 두 병 정도까지 마셔도 정신이 온전한 편이다. 더 나아가 지인들과 술을 마시다 보면 끝까지 남아 있거나 술이 취한 사람들을 챙기거나 돌려보내는 쪽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꽐라가 나는 경우가 있다. 술을 한창 마실 때, 다시 말해 일주일에 한 두어 번은 기본적으로 마실 때를 말한다. 이때 마시는 술은 집에서 혼자 적당히 한 잔 하는 술이 아닌 밖으로 나가 사람들과 술집에서 만나 마시는 술을 말한다. 한창때 거짓말을 보탤 필요도 없이 일주일에 한 두어 번, 조금 과하면 서너 번은 술을 마셨다. 그런 시절에 일 년에 한 두어 번은 꽐라가 났다.
술을 언제부터 마셨나 생각해 보니 처음 마신 건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지금과 다르게 고등학교도 시험을 보고 들어가던 시절이라 시험을 보기 전 백일주라는 걸 친구 어머님의 배려(?)로 친구 집에서 어머님이 해 주신 안주와 함께 맥주 한 잔 마신 게 시작이었다. 같잖은 중딩 꼬꼬마 놈들이 겁도 없이 술을... 시절이 그랬다. 적당히 나이 들어 보이면 술이고 담배고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시절이었다. 오죽하면 고등학생들을 주로 받는 술집이 있을 정도였다. 지금은 사라졌겠지만 이름도 기가 막혔던 ‘아지트’라는 술집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물론 고딩 때였다. 그 집 골뱅이소면이 맛있었는데.
대학생 시절엔 그야말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마셨다. 매일이 술이었다. 날이 좋아 마시고 비가 와서 마시고 기분이 좋아 마시고 기분이 나빠 마시고 그냥 마시고... 그렇게 대학교를 졸업하고 첫 직장을 잡고 두 번째 직장을 그만두는 30대 초반까지 정말 오지게 술을 마셨다. 잘 마셨다. 안주도 잘 먹고. 술집에서 나오는 안주는 어쩜 그리 맛있는지...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맛대가리 없는 쓰디쓴 술을 마시게 하려면 안주가 맛있어야 했다.
두 번째 직장을 그만두고 백수가 됐다. 세상은 사회는 냉정해서 백수와 함께 술을 마셔 줄 사람은 없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친했던 친구 한 놈 하고만 간간히 술을 마셨다. 돈도 없으니 술집에 자주 가는 게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때부터 의도치 않게 슬슬 술을 줄인 거 같다. 다만 의도치 않고 줄인 술이라 술을 마실 기회가 생기면 어제까지 술을 신나게 마셨던 것처럼 또 잘 마셨다. 슈퍼나 마트에서 술과 안주거리를 사서 집에서 먹으면 싸게 먹을 수 있지만 이게 또 집에서 혼자 먹는 술이라는 게 영 분위기가 안 살아서 간혹 치킨을 먹을 때나 우울할 때를 제외하면 집에서 혼자 술을 마실 일은 거의 없었다.
세 번째 직업인 바리스타를 거쳐 지금에 이르러 술을 마실 기회가 이전보다 현저히 줄었다. 바리스타로 일을 할 때는 보통 나보다 많이 어린 친구들하고 일을 해서 같이 술을 마실 일이 적었고 지금 하는 일은 혼자 하는 일이라 역시 술을 마실 일이 적었다. 결정적으로 결혼을 하면서 아내와 술을 조금만 마시겠다고 약속을 해서 술을 마시는 기회뿐만 아니라 한 번에 마시는 양도 현저하게 줄게 됐다. 다행히 한창때 술을 그렇게 마셨음에도 중독은 아니었는지 술을 마실 기회가 줄어든 게 다소 아쉬운 정도에 그쳤다.
기억에 의하면 결혼하면서 한 달에 맥주 네 캔만 마시겠다고 한 거 같다. 그래서 매달 초 즈음해서 그달에 마실 맥주를 4~5캔 정도 산 거 같다. 간혹 다섯 캔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마트에서 해외맥주 다섯 캔을 만 원에 파는 경우가 있어 같은 만 원인데 다섯 캔 사게 해 달라고 졸라서 사는 경우였다. 이 부분이 확장돼 같은 만 원은 아니지만 이천 원 정도만 더 주면 국산맥주 여덟 캔을 살 수 있다는 철저하게 내 입장에서의 합리화를 통해 아내를 반 강제로 설득해 순식간에 한 달에 네 캔의 맥주가 여덟 캔으로 둔갑해 버린 지경에 이르게 됐다. 결론적으로 한 달에 만 원에서 만 오천 원 선의 술을 사서 마실 수 있는 상황까지 만들어 버렸다. 의지의 한국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결혼생활을 하면서 나의 음주라이프는 나름 자리를 잡아갔다. 중간에 아이를 낳고 아이의 면역체계가 잡혀 가는 처음 일 년이라는 시간 동안 응급상황을 대비해 아예 술을 끊은 적도 있지만 그 시기를 제외하곤 적당량의 술을 꾸준히 마셔 왔다. 최근 들어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술을 마실 기회와 양을 점점 늘려오기도 했다. 그러던 와중 최근에 사달이 났다.
지난해 12월 초에 처가에 가서 저녁 먹을 일이 있었다. 처가에 가서 저녁을 먹는 날은 술을 마시는 날이다. 아버님께서 술을 좋아하셔서 사위들이 오면 그냥 저녁을 드시는데 그치지 않고 꼭 술을 같이 하셨다. 그럼 나 역시 사위된 도리로 당당하게 아내에게 운전을 맡기고 술을 마셨다. 아내가 한 두 마디 잔소리하면 아니 저기 아버님 술 혼자 드시게 할 거야라는 효도 코스프레로 반격을 했다. 그럼 아내는 못 이기는 척 운전을 맡았고 난 신나서 술을 마셨다.
그날도 그랬다. 안주도 좋았다. 맛있는 회가 한가득이었다. 회가 나왔다는 건 막판에 매운탕도 나온다는 이야기다. 술도 마시고 회도 먹고 매운탕으로 즉석에서 해장도 하고 그야말로 가재 잡고 도랑 치는 격이었다. 맛있는 회를 꼭꼭 씹어 먹으며 역시 맛있는 소맥을 꿀꺽꿀꺽 마셨다. 이전에 사 드린 양주가 있었는데 그 양주도 나왔다. 이거 뭐 그냥 잔칫날이다. 그렇게 신나게 마셨다. 그런데 너무 신이 났는지 그날이 하필이면 술을 한창 마실 때를 기준으로 일 년에 한 두어 번 꽐라가 나는 날이 돼 버렸다. 술을 마시다 화장실에 몇 번 왔다 갔다 하면서 게워내고 집에 와서 마저 다 게워 냈다. 죽을 거 같았다. 사실 그때 약을 조금 먹고 있었다. 그래서 술을 많이 마시면 안 됐는데 술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런 거 언제부터 신경이나 썼다고...
그런데 약간 다른 변화가 하나 생겼다. 술을 한창 마실 때는 간혹 꽐라가 나도 하루 이틀 지나고 술 마실 일이 생기면 언제 꽐라가 나서 먹은 걸 다 확인했나 싶을 정도로 신나서 다시 마셨는데 이번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아... 술을 줄여야 하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사실 최근에 마시던 술의 양은 한창때에 비하면 그저 입가심 수준이었는데 한 번 꽐라가 났다고 내가 이런 생각을 하다니 조금 놀라웠다. 아니야, 약을 먹고 있어서 그런 거야 하는 합리화로 적당히 덮었지만 이제 나이가 조금 들어차서 그런 건가 싶은 생각이 꾸물꾸물 올라오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이 주 정도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술을 마실 일이 생겼다. 역시 처가에 가서 저녁을 먹는 날이었는데 이번엔 처가로 가지 않고 밖에 식당에서 먹기로 했다. 안주는 삼겹살이었다. 이거 뭐 그냥 소주와 맥주 그리고 소맥을 부어라 마셔라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 걸맞게 신나게 먹고 마셨다. 후식으로 가게에 있던 아이스크림까지 맛나게 먹고 집에 왔다. 마침 집 앞에 쓰레기를 치워야 되는 날이라 소화도 시킬 겸 한 30분 정도 치우고 들어 왔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약을 아직 먹고 있어서 그 약을 먹고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그리곤 다시 한번 방금 전에 먹었던 모든 걸 다 확인하게 됐다.
어! 이거 이상한데? 한 달도 안 되는 기간에 두 번이나 꽐라가 나 먹은 걸 다 확인한다고? 이건 뭔가 조금 문제가 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두려웠다. 40대 중반이 이렇게 무서운 건가? 아니야, 이번엔 확실히 괜찮았는데 약을 먹고 나서 그렇게 된 거야. 약이 문제일 거야. 아니지, 정확히는 약을 먹는 동안 술을 마시면 안 되는데 무시하고 마신 내가 문제야.
그렇게 마무리가 됐으면 이런 글도 아마 안 썼을 것이다. 얼마 뒤 아내 생일에 다시 한번 처가에 가서 다 같이 저녁을 먹는데 최근 들어 두 번이나 꽐라가 나 조금 무서웠는지 저녁만 맛있게 먹고 술은 맥주로 두 캔 반 정도만 마셨다. 평소의 나라면 맥주 두 캔 반 정도는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표현으로 그냥 물을 마시는 수준이었다. 사실 맥주는 배가 불러서 못 먹는 경우는 있어도 취해서 못 먹는 경우는 없었다. 그런 맥주를 겨우 두 캔 반 정도 마시고 집에 돌아와 다시 한번 먹은 걸 다 확인하게 됐다.
한 달 반 새에 세 번이나 꽐라가 났고 마지막 한 번은 겨우 맥주 두 캔 반 정도만 마시고 그렇게 됐다. 심각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약을 먹고 있었다곤 하지만 이건 너무 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술을 끊어야 하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다. 자신 있게 이야기하지만 난 술을 끊을 수 있다. 술을 잘 마시고 즐겼다 뿐이지 애초에 중독자도 아니었기에 더불어 최근의 상황을 놓고 보면 술을 끊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소 아쉬웠다. 그래도 기분 좋게 한두 잔 정도 할 수 있는 경우가 있을 텐데 술을 끊어 버리면 그 순간의 번뇌를 어찌할까 하는 생각이 술을 끊어야겠다는 결정을 막았다.
아내 생일 이후 지금까지 두 달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스스로 확인해 보고 싶어 혼자 술을 두 번 마셔 봤다. 둘 다 어쩌다 와인으로 마셨는데 한 번은 한 병을 맛있게 마셨고 한 번은 반 병만 마셨다. 반 병을 마신 날 결정했다. 절주 하자. 결혼할 때 약속했던 한 달에 맥주 네 캔보다 적은 필요한 순간에 정말 기분 좋게 한두 잔 마실 수 있는 날만 마시자고 결정했다. 이 결정을 뒷받침할 수 있는 나름의 변화가 있는데 그 이후에도 처가에 가서 저녁을 먹은 날이 몇 번 있었다. 그때마다 당연히 운전은 내가 했고 음료수를 사 들고 가서 아버님과 대작을 했다. 아버님은 다소 아쉬워하셨지만 이해해 주셨다.
이야기하는늑대
살아 온 이야기, 살고 있는 이야기, 살아 갈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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