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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이야기하는늑대25. 06. 19 · 읽음 202

 아내를 2016년에 만나 2년 조금 안 되는 시간 동안 연애를 하고 2018년에 결혼을 했다. 그리고 얼마 전에 결혼한 지 7년이 넘었다. 두 달 정도 후면 연애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아내와 함께 한 시간이 9년이 넘게 된다. 거의 10년이다. 내 삶 전체 속에서 5분의 1을 함께 한 사람이다. 짧다면 짧을 수도 있고 길다 면 길 수도 있는 그런 시간이다.

 

 

 그런 아내와 난 아직도 잊을 만하면 싸운다. 10년 정도 함께 했으면 안 싸울 법도 한데 아직 싸우고 있다. 그런데 사실 거의 평생을 함께 하는 가족 하고도 툭하면 싸우는데 10년 정도 함께 살았다고 안 싸울 거라고 생각하는 건 어찌 보면 망상 같기도 하다. 정확히는 기대인 거 같다. 이쯤 됐으면 서로 이해를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그래야 되는 거 아닌가 하는 당위로서 기대를 하는 거 같다.

 

 

 굳이 시기별로 나눠 생각해 보면 연애하던 시절에는 적당히 싸웠고(이 적당히는 워낙 상대적이라 그 빈도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신혼 때부터 아이를 낳고 얼마 안 됐을 때까지 꽤 많이 싸웠다. 그리고 최근인데(여기서 최근은 2년 남짓인 거 같다.) 싸움의 빈도가 많이 줄었다. 대충 연애하던 시절보다 덜 싸우는 거 같다. 그러니까 최근이 사이가 가장 좋은 거 같다.(부부사이의 좋고 나쁨을 싸움의 빈도로만 본다면)

 

 

 다소 웃긴 건 많이 싸웠을 때나 조금 덜 싸우고 있는 지금이나 싸우는 이유는 거의 같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진지하게 상대방을 ‘이해한다.’라는 개념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린 생각보다 너무 쉽게 상대방을 이해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고, 이해해야 한다고 우기는 경향이 있다. ‘우긴다.’는 표현을 쓴 이유는 상대를 온전하게 이해하는 게 과연 쉬운 일인가를 생각해 봤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다. 오만하지 않은가? 내가 뭐라고 상대방을 이해한다니...

 

 

 사람은 다르다. 지구상의 80억 명이 다 다르다. 생긴 것도 생각하는 것도 모두 다르다. 살아온 환경도 다르다. 이 살아온 환경이 다르다는 게 얼마나 다른가 하면 같은 집에서 같은 부모 아래 자란 아이들도 다 다른 걸 보면 손톱만큼도 같은 사람이 이 지구상엔 단 한 명도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사회를 이루고 사는 사회적 동물로서 일반적인 생각이나 행동 등은 대체적으로 같다고 할 수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사회를 이루고 살면서 큰 탈이 나지 않으려면 그래야 된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온전하게 100% 같지 않다.

 

 

 그런 사람 중에 한 명과 결혼을 해서 살고 있으니 매일매일이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의 연속일 것은 너무 자명한 일이다. 그 연속되는 과정이 감정을 건드리면 칼로 물 베기라는 아름다운 부부싸움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이다. 그러니 안 싸우고 배길 수가 있겠는가? 정도와 빈도의 차이일 뿐이지 정말 많은 부부들이 많이 싸워 왔고 싸우고 있고 싸울 것이다.

 

 

 한 편으론 그렇게 싸우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게 싸우는 이유는 결과적으로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의 간극을 좁히는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싸우는 동안 선은 넘지 말아야 한다는 암묵적 동의는 필수다. 그 선을 넘어서는 순간 끝을 보는 건데 그 끝은 결코 아름답지 않기에 선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해서 그 선을 지키기만 한다면 조금 자주 싸워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싸움은 줄이는 게 맞다. 어떻게 줄일 것 인가? 서로를 이해하면 되는 건가? 그런데 이런 생각이 오히려 싸움을 유발하는 거 같다. 앞에도 언급했지만 감히 상대방을 이해한다니... 너무나도 다른 환경에서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을 이해한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인가? 그렇게 접근하다 보니 결국 상대방을 설득시키려 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이때 흔히 쓰는 표현이 있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이 표현은 결국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너를 이해할 수 없고 내 생각은 이러니까 네가 나를 이해해야 되는 거야라는 강압이 담긴 설득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서로 뫼비우스의 띠 위를 달리듯이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을 무한 반복하게 된다. 상대방을 이해한다고 시작했지만 결론적으로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오히려 설득을 가장한 나의 상황을 이해시키려는 모습만 발견할 뿐이다.

 

 

 나도 그랬다. 난 살면서 소위 ‘말 빨’로 누구에게 밀려 본 적이 별로 없다. 마음먹고 격하게 표현해서 말 빨로 ‘조지면’ 상대가 누구 건 상황이 어떻건 간에 보통 밀리지 않았다. 그런 내가 결혼을 했으니 이해라는 가면을 쓰고 얼마나 많이 아내를 이해시키려고(설득하려고) 애를 썼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바로 그 대상이 아내라는 것이다. 이전의 다른 상대와는 말 빨로 조지면서 상대가 기분이 상하건 말건 내가 안 밀리면 그만이라는 생각과 끝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싸웠다면 아내와는 그럴 수가 없었다. 앞에도 말했지만 선을 넘어 싸우면 끝을 보는 건데 그 끝은 결코 아름답지 않으니... 이건 뭐 하던 대로 끝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최선을 다해 싸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난 과연 아내를 이해할 수 있는가? 조금 더 생각했다. 사람이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가? 보통 이런 싸움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고 관점의 차이인데 그 부분을 과연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가? 아니 이해한다는 생각이 맞는 건가? 결론은 그럴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됐다. 인간으로 살면서 옳고 그름의 문제는 분명히 서로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가치관이나 관점 등의 차이는 쉽게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겠다고 덤벼도 안 된다.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저 사람은 저런 사람이고 나는 이런 사람이다 이렇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딱히 명석하지도 않은 논리적이지도 않은 머리로 같잖게 이해하려 애쓰지 말고 마음이란 그릇으로 그저 담아내면 되는 것이다. 부부사이라면 그 마음의 그릇은 분명 사랑으로 만들어진 건데 그 마음으로 담아내는 것이다. 내가 저런 사람을 사랑한 거지, 아니 저런 사람이었기 때문에 내가 사랑한 거 아닌가? 그런데 왜 이제 와서 되지도 않는 이해를 하려 하는 거지? 이해하지 말고 사랑이라는 마음의 그릇으로 담아내는 것이다.

 

 

 애초에 뜨거운 음식을 두고 뜨겁다고 왜 뜨거운 거냐고 따져 물을 게 아니라 그릇이 깨지지 않기를 바라며 담아내면 그뿐이다. 정확히 어느 시점이라고 할 수 없고 또 잘하는 것도 아니지만 아내와 싸움이 준 이유는 분명하게 이해하려는 머리를 담아내려는 마음으로 돌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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