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0년 차 가정주부이자 육아전담자이다. 가정주부라는 단어를 쓰고 들을 때마다 내 손으로 돈 버는 그림을 얼마나 많이도 그려왔던가. 스케치에 머물러 한 번도 채색되지 않은 그림, 그 스케치조차 자꾸 바뀌어 종이가 너덜너덜해진 나의 상상. 그림 속에서는 회사에 다녀보고, 작은 가게를 열어본다. 아니꼬운 상사를 다시 만나보고 상대하기 어려운 손님도 맞닥뜨려본다. 그러다가 10년 전 퇴사의 선택을 후회하며 세탁기에 빨랫감을 넣고 청소기를 돌리며 다시 나의 현실 일터로 되돌아온다.
"당신은 집에서 하루종일 뭐 해?"
"엄마는 우리 없을 때 뭐 해? 아무데도 안 가고 집에 있어서 너무 좋겠다."
나를 답답하게 만드는 질문이다. 매일 다른 메뉴를 원하는 아이들에게 아침을 차려 주고, 회사 가는 남편을 배웅하고, 두 아이가 학교에 가고 나면 하루 중 가장 바쁜 시간이 시작된다. 오전 8시 20분 등교를 하고 오후 12시 50분 혹은 1시 50분 하교를 한다. 4시간 반 혹은 5시간 반의 주어진 시간동안 모든 집안일을 마치고 장을 보고 간식을 준비해두고 점심을 먹어야 한다. 그리고 하교하는 아이들을 맞이해야 한다.
'자! 8시 20분이다! 시작!'
뒤집어 벗어 놓은 양말꼴이 그렇게 사나울 수가 없다. 분류한 빨랫감을 세탁기에 넣어놓고 바닥에 벗어놓은 허물같은 내복 바지를 개키며 한숨을 내쉰다. 그릇에 척하니 말라 붙은 케첩을 벅벅 닦으며 설거지를 한다. 월요일은 화장실 대청소가 있는 날이어서 시간도 힘도 많이 소비된다. 월요일을 제외한 나머지 6일은 간소하게 화장실 청소를 하는데, 이는 화장실을 더럽게 쓰는 남편 덕에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다. 이렇게 가장 기본적이고 일상성을 지닌 일을 최대한 신속히 끝내고 나면 그제서야 거울을 볼 시간이 생긴다. 씻고 화장품을 바르면서 오늘 해야 할 일의 순서를 정한다. 이제 9시 20분이다.
1. 간식 만들기1(늙은호박 식빵 만들기)
반죽하기
2. 장보기(저녁 메뉴: 돼지목살간장구이, 샐러드, 된장국)
살 것: 돼지목살 1근, 부추, 브로콜리, 당근, 양상추
3. 간식 만들기2(늙은 호박 식빵 만들기)
발효시킨 반죽 성형하고 2차 발효하기
4. 점심 식사
5. 간식 만들기3(늙은 호박 식빵 만들기)
2차 발효 끝난 빵 반죽 오븐에 넣어 굽기
6. 아이들 하교 픽업
7. 간식 먹이기
완성된 늙은호박 식빵과 토마토, 아몬드
8. 숙제 봐주기
9. 짧은 휴식
10. 저녁식사 준비
꾸물거릴 시간이 별로 없다. 아이들이 식빵을 먹고 싶어해서 하교 전까지 만들어두려면 발효시간 감안하여 빨리 움직여야 한다. 1차 발효에 장을 보고 2차 발효에 점심을 먹으면 딱 맞겠다. 사회생활을 할 때에도 이렇게 계획적이고 분(分) 단위로 움직였던가. 남의 손에서 돈 나오기가 쉽지 않더라도 쉬는 시간도 있고 동료들과 커피 마시며 수다도 떨고 연차도 쌓이고 주어진 휴가도 마땅히 썼는데, 가사일이란 게 집에서 이루어지다보니 매일이 휴가같고 매 시간이 휴식같아 보여 더 쉴 새 없이 움직이게 된다. 그러나 남편과 아이들은 아내가 혹은 엄마가 집에 있으니 놀고 쉬고 편하게 지낸다고 생각을 한다. 내가 집안일을 하는 방식 그대로 남편이 단 일주일만 경험해본다해도 팔자 (八字) 편한 여자라며 나의 수고를 하찮게 여길까?
언제나처럼 티 하나 나지않는 살림꾸리기에 2022년이 다 지나고 2023년이 되었다. 남편의 노동은 보수가 따르지만 내 노동의 결과는 드러나지 않는다. 가족들이 일터로, 학교로 가면 나의 일은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니 가족들은 나의 시간이 어떻게 채워지는지 모른다. 쾌적한 집, 따뜻한 밥은 당연한 것일 뿐. 그래서 나의 하루를, 한 달을, 일 년을 기록하기로 결정했다. 기록된 하루 하루가 1년으로 차곡히 쌓이면 내가 집에서 보낸 시간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서점에서 가서 쓸만한 스케줄표를 구입했다. 달력도 큼지막하고 매일 메모를 남길 수 있는 공간도 충분한 그런 수첩이다. 뭔가 학생이 된 듯 기분이 새로워졌다. 구석에 두었던 카메라도 꺼냈다. 사진과 영상에 담길 나의 하루가 나를 잘 나타내줄 수 있을까? 오늘의 나는, 지금 이 시간의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는 모습으로 기록되고 있다. 나의 2023년 버킷리스트는 나의 일상, 나의 시간, 나를 남기는 것이다. 나의 시간은 보잘것없지 않음을 보여주는 한 해를 만들어가는 것, 2023년은 평범하지만 쓸모있을 것이다.
북캉스
일상다반사, 일상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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