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혼자 잘 살아~" 친구의 비혼식에 다녀왔어요
추희자두23. 02. 25 · 읽음 1,196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앞으로의 삶을 응원받는 자리, '비혼식'이라는 게 있다고는 들어 봤지만 나도 내 주변의 아무도 가본 적 없는 미지의 행사였다.

 

최근까지도 '비혼'은 '아닐 미(未)'자를 써 '미혼'이라 불리며 '안 할 것'이 아닌 '아직 못 한 것'이라 여겨졌다. 그만큼 비혼은 자랑거리가 아니었고 감히 축하받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못했다.

 

시대가 변하면서 주변에 "결혼?"하면 "굳이?"라고 답하는 친구들이 하나둘씩 늘어났다. 하지만 비혼식을 하겠다고 선뜻 나서는 이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실행력 최고인 고등학교 친구가 코로나 때문에 미룬 비혼식을 열게 됐다며 초대장을 보내왔다.

 

비혼식은 결혼식과 달리 정해진 식순이 없어서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대로 정하고 자유롭게 기획할 수 있다. 하객의 대부분이 또래의 친구와 지인이니 보수적인 어른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새로운 시도를 주저할 필요도 없다. 이렇게 메타몽처럼 어떤 모습으로든 변할 수 있는 비혼식이 어떻게 진행될지 궁금하고 기대돼 자랑 좀 하고 다녔다. 그랬더니 너무 궁금해서 그러는데 친분 없는 자신도 갈 수 있냐며 축의금을 내겠다고 자진한 지인도 있었다.

 

디데이가 밝았고 비혼식을 위해 대관한 칵테일바에 도착했다. 식을 개최한 친구는 노란 꽃 부토니에를 꽂은 화사한 회색 정장을 입고 봄처럼 나를 맞이했다. 정장을 입은 친구의 모습이 낯설었지만 제법 근사했다. 좌석표를 보고 내 자리로 가니 테이블 위에 장미 한 송이와 내 이름이 인쇄된 투명 카드가 있었다. 축하하러 온 자리에서 깜짝 선물을 받으니 귀빈이 된 것 같아 들떴다.

 

드디어 비혼식이 시작됐다. 첫 번째 순서는 주인공 입장이었다. 신랑도 신부도 아니라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으니 그냥 주인공이라 하겠다. 사회자의 소개와 함께 오늘의 주인공이 박수갈채를 받으며 하객들 속에서 씩씩하게 뛰어나왔다. 화려한 웨딩드레스나 버진로드와 같은 볼거리가 없으니 어떻게 무대를 꾸며야 할지 많이 고민했다지만 평소 축구, 농구 등 여러 스포츠를 섭렵하며 활기찬 삶을 사는 친구에게 더 없이 어울리는 등장이었다.

 

"다음은 하객 소개입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전개에 40명 가까이 되는 하객이 일동 술렁였다.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주인공이 아닌 들러리를 소개한다고? 주인공은 모두 자신과 친하다는 공통분모가 있으니 초면이어도 쉽게 친해질 수 있을 거라며 당황한 우리를 안심시켰다. 모든 순서가 기존의 관행을 뒤엎는 신선한 반전의 연속이었다. 

 

친구는 하객 한명 한명의 취미나 관심사, 지금까지 해 온 활동에 대해서 설명했다. 멘트 한 줄 한 줄에서 애정이 묻어났다. 식장에서 그저 누구의 친구, 누구의 딸, 누구의 회사 동료가 아닌 이런 뜻을 품고 이런 삶을 지향하는 사람이라고 소개되는 것은 처음이었다. 듣다 보니 '저 사람과 한 번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같은 뜻을 가진 사람에게 다가가 슬쩍 말을 걸어볼 수 있었다. 한 사람만 빛나는 자리가 아니라 모두를 위한 자리를 마련해준 것이었다.

 

메뉴에서도 친구의 사려 깊은 마음씨가 느껴졌다. 알콜, 논알콜, 비건, 논비건 음식이 고루 준비되어 있어 술을 먹지 못하는 사람, 채식을 하는 사람 모두가 마음 놓고 먹을 수 있었다. 나는 논알콜 칵테일 핑크멜론아이스버그와 양배추스테이크, 두부가지버섯튀김을 선택했는데 식장에서 이렇게 편안하고 만족스러운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비혼식에서 먹은 비건 두부가지버섯튀김과 양배추 스테이크, 논알콜 칵테일 핑크멜론아이스버그

 

뒤이어 축가, 축사, 랜선 집들이 등 순서가 지나고 우리는 대망의 비혼 선언문을 다 같이 낭독했다.

 

"나 OOO은 평생 스스로를 아끼고 사랑할 것을 굳게 맹세합니다. 오늘 참석한 모두가 증인이 되어 이 맹세가 진실하게 이루어졌음을 선언합니다"

 

끝으로 하객들은 "혼자 잘 살아~"라고 덕담을 건넸다. 언뜻 듣기엔 악담처럼 들리기도 한다. 실제로 결혼을 안 한다고 하면 "외롭고 쓸쓸한 노년을 보내다 고독사하면 어쩌려고 그래"라는 걱정인지 저주인지 모를 말을 퍼붓는 이도 있으니까. 하지만 오늘 비혼을 맹세한 내 친구는 증명했다. 혼자 잘 사는 사람, 스스로 행복을 길러 낼 수 있는 사람 곁에는 잔칫집처럼 늘 사람이 북적인다는 사실을.

 

평생 변치 않고 내 곁에 있어 줄 단 한 사람, 영원히 사랑할 단 한 사람은 어쩌면 나 자신뿐이다. 그러므로 혼자와 함께 혼자 잘 사는 것이 최고로 잘 사는 삶이다. 그러니 인생에 한 번쯤은 죽을 때까지 함께일 나를 위해 성대한 잔치를 열어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이건 리스크가 없는 투자니까.

 

한편으로는 비혼식까지 치렀는데 '마음이 바뀌면 어쩌지' 하는 걱정도 든다. 벌써부터 "나중에 결혼하고 싶어지면 어쩌려고 그래"라며 말리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그건 결혼도 마찬가지 아닌가? 우리는 신랑과 신부가 영원을 맹세한 지 몇 년도 채 안 돼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을 수 있다는 것도, 더 잘 맞는 사람과 재혼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알지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저 축하해준다.

 

심지어 만난 지 일주일도 안 된 사람과 결혼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왜 비혼을 선언할 때만 유독 수없이 검열받고 초 치는 말을 들어야 할까? 지레 겁먹을 필요 없다. 용기를 내어 지금 이 순간 나의 선택을 존중하자.

 

비혼식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렇게 혼자 잘 살라고 그렇게 빌어주고 왔건만, 이상하게도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든든했다.

 

비혼식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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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희자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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