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고기를 먹지 않는 직장인의 회식
달덩이23. 03. 07 · 읽음 453

3년이다. 고기를 먹지 않은지. 육류는 먹지 않지만 해산물과 달걀, 유제품은 가끔 먹는 페스코 베지테리언으로 3년째 살아가고 있다. 평소에는 큰 불편함이 없다. 가족들은 내게 고기를 강권하지 않고 내가 없을 때만 고기를 먹는다. 데이트를 하거나 친구들을 만날 때는 주로 비건 식당에 가는데, 요즘 새로 생긴 비건 맛집이 많아서 오히려 즐거운 미식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아직 힘든 곳은 직장이다. 지난 3년 동안 직장을 두 번 바꿨다. 아주 작은 동네 책방에서 작은 IT 스타트업을 거쳐, 지금은 조금 규모 있는 IT 스타트업에서 일하고 있다. (내게 맞는 일을 찾아가는 나의 이직 스토리도 언젠가는 이곳에 풀어가고 싶다.) 세 곳 모두 새로운 변화와 다양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분들이 많은 환경이라 다행히 내 식성에 대해서 거부감을 보인 분들은 없었다. 점심은 도시락을 챙겨간다. 제철 야채와 두부, 템페, 해조류 등등 여러 가지 식물성 재료를 그때그때 조합해서 찌거나 볶거나 아니면 그냥 생으로 밥 위에 얹은 비건 덮밥이 주 메뉴다. 다 같이 먹는 점심 메뉴에 대한 스트레스는 거의 없다. 여기까지 보면 순탄하다.

 

주로 회식 때가 불편하고 어렵다.

 

업무 특성 상 오프라인 행사를 할 때가 많은데, 행사장에서 많이 움직이다 보니 지친 팀원들은 고기를 찾는다. 에너지를 많이 쓰면 고기를 먹고 싶은 마음이 당연히 있을 수 있으니 고깃집에 함께 간다. 나는 옆에서 버섯이나 고사리나 콩나물을 배불리 구워 먹고, 누룽지를 시킨다. 육회비빔밥을 주문해서 육회를 따로 빼서 직원들에게 주고, 남은 야채에 고추장을 잔뜩 뿌려 밥을 비벼먹는다. 갈비탕 집에 가면 비빔막국수를 먹고 고명으로 올라온 고기를 팀원에게 건넨다. 아주 가끔은 직원분들이 나의 식성을 배려해서 횟집에 가거나 파스타 가게에 갈 때도 있다.

 

상황이 너무 웃겨서 열심히 찍어서 인스타 스토리에 올렸다

 

사실 채식을 하는 것은 소수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에 이 정도 불편함은 각오해서 괜찮다.

다른 이들이 고기를 먹는 것도, 크게 불편하지 않다. 나도 30년 가까이 고기를 맛있게 먹었기 때문에 고기 먹는 이들을 탓할 생각이 없다. 물론 나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고기 소비를 줄였으면 하지만, 내게는 활동가의 면모가 없기 때문에 나 홀로 소심한 채식을 할 뿐이다.

 

다만 나는 정말 튀고 싶지가 않은데 고기를 안 먹는다는 것은 좀 튀어서 불편하다.

고깃집에서 누룽지를 먹는 나를 보며 미안해하고, 나를 배려해서 다수의 메뉴를 (회삿돈으로 비싼 고기를 먹고 싶을지도 모르는 이들의 식사 메뉴를) 정하는 게 참 민망하고 괜히 죄송스럽고 불편하다.

회사 근처에 내가 갈 수 있는 맛집을 빠삭하게 꿰고 있어서 그때그때 당당하게 원하는 메뉴를 제안하면 괜찮을까?

워낙 주목받는 걸 싫어하고, 내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은 사람인지라 채식을 할 때 이런 부분이 가장 힘들다.

 

3년 동안 고기를 먹지 않는 직장인으로 살아왔지만 이제야 이 세상의 육식파 회식에 적응해가고 있다. 전전 직장에서는 퇴사할 때 비건 식당에서 회식을 해주셨고, 전 직장에서는 회식이 거의 없어서 크게 힘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고기에 진심인 직원분들이 많고 회식이 비교적 많아서 아주 머리가 아프다. 가끔은 그냥 밖에서는 고기를 먹어버릴까도 싶다. 그러면 이 모든 문제가 해결될 테니까. 아니면 사람을 만날 필요 없는 일을 새로 찾아봐야 하나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둘 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은 아닌 것 같다. 

 

일단은 이 상태를 유지해 보면서 이 불편함 속에도 내가 살 길이 있다는 것을 직접 실험을 통해 알아보고 싶다. 아직은 고기를 아무렇지 않게 먹으면 좀 괴로울 것 같다. 내가 회사에서 회식 때마다 느끼는 불편함보다는, 육식으로 인해 발생하는 여러가지 문제가 좀 더 많이 불편하다.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 학생회에서는 교내 모든 식당에서 비건 메뉴만 취급하도록 학교랑 본격적으로 협의중이라던데, 이제 비건이 덜 소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일까. 그 때까지 기다리면 되려나. 아니면 평소에 별 것도 아닌 거에 미안해하는 소심한 나의 태도를 바꾸면 좀 나아지려나. 아직은 잘 모르겠다. 혹시 채식을 하는 직장인 여러분 계신가요? 저와 비슷한 고민을 가지고 계시다면, 본인만의 회식 타파 비법이 있으시다면 혹은 주변에 고기 안먹는 직장 동료를 보며 든 생각이 있으시다면 뭐든 공유해주세요. 미리 감사드립니다.

 

5
달덩이
팔로워

나에게 맞는 일을 찾는 여정 속에, 4번째 회사에 다니고 있는 IT 스타트업 직장인. 관심사는 채식과 미니멀리즘, 루틴.

댓글 5

첫 번째 댓글을 입력해 주세요.

전체 스토리

    이런 글은 어떠세요? 👀

    신고하기